서울대학교
서양화과 판화전공
석사
서울대학교
서양화
학사
작업이란 도처에 충만한 무의미에서 유의미를 건져올리는 것
-작업을 하는 시간은 소통을 중지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종류의 소통이 중지된 시간을 좋아한다. 지구가 자전하고 있으면서도 공전하고 있듯이 소통 중지의 시간을 돌면서도 사실은 공전 속에 있음을 잠시 잊고 스스로 은폐되었다고 믿는 주관의 세계에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나만이 근거가 되고 실체는 소스로만 존재하는 그 속에서 유의미를 건져올리는 시간과 노동이 긴급히 필요해졌다. 마음은 이제 그 노동의 시간을 요구한다.
몽환, 몽상. 이 단어들이 나의 작업세계의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것을 방금 전 깨달았다.
-라고 어느 날 스마트폰 노트에 적어 놓았다. 깊은 절망이나 열망 같은 견고한 단어보다 몽환이나 몽상같은 떠도는 단어들이 내 태도의 근거가 된다.풍경을 위한 풍경이 아니다. 나의 풍경화는 일종의 소화제이다. 신물나는 관계와 현상들을 내적 시선과 정경으로 대치하여 현실에 대응하고자 하는 나만의 대처 방식이다. 작업은 환자와 치료자가 동일인인 치유의 방식이다. 나의 풍경은 쓸모없는 풍경이지만 그 쓸모 없음으로 해소의 공간이 되고, 하염 없는 풍경이며, 본래의 의미를 잃은 풍경이기에 유의미해진 풍경이다. 작가노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말하자면 이제 말하는 법을 배웠다.
-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그릴 때의 내가 좋다. 그런데 무엇을 그려가야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그려보는 수밖에. 그리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자발적으로 오로지 나를 위해 하고자하는 일이다.” 라는. 나는 자발적으로, 진심으로 허튼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말하기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제야 말하는 방식을 배운 것 같다.
고통은 중간을, 평범을 좋아한다. 그의 영역은 중간이다.
-아이의 음악책 중 미셸 슈나이더가 지은 [슈만, 내면의 풍경]이란 책이 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고통은 중간을, 평범을 좋아한다. 그의 영역은 중간이다...... 고통이란 그저 떠돌다가 무의미한 것에 달라붙는다.
나의 작업은 그 중간 쯤 어딘가에서 부지런히 유의미를 창출하기를 바란다.
예정된 상실은 슬프지만은 않다.
-어제는 충만한 하루였다. 예정된 상실은 슬프지만은 않다. 아예 가져본적이 없는 것보단 한번 가졌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이 낫다라고 생각한다. 가져보았기에 상실이 있을 뿐이다. 아니다. 때론 가져본 적이 없는 것도 상실하기도 한다. 작업은 이런 상실-사라져버린 것, 혹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몹시 게으른 기록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