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동양화
석사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서서히 변하는 자연의 순간들이 모여 계절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자연 속의 개체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단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의 작업은 자연을 변화하게 하는 힘, 곧 실재(The Real)의 작용을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했다.
2015년부터 작업해 온 《Mer forte》 시리즈는 말 그대로 거센 파도를 표현한 것이다. 파도를 소재로 선택하였던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형체 없는 물을 만나 부서지는 순간이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아무 말 없이 계속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치유됨을 느꼈다. 파도는 의미로 가득 찬 해변으로 밀려오며 모든 의미를 허물어뜨렸다. 나는 그 해변에 서서 드로잉을 하고 글을 쓴 후,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2017년부터는《행성 드로잉》시리즈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구에서는 지금도 많은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과거와 현재는 상이한 모습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겨나고(creation), 융기하며(uplift), 소멸(destruction)할 것이다. 행성 드로잉은 끊임없이 변화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의 모습과 그 힘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개인적으로 반려견 두 마리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갑작스러운 죽음도 있었고, 예상은 했지만 가슴 아픈 죽음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왜 삶과 죽음이 늘 같은 곳에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살았을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은 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게 되었다. 그곳에는 1968년 12월 인류가 처음 달 궤도를 돌며 찍었던 사진이 있었다. 아폴로 8호의 세 명의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목격하였으며, 지구라는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했다.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던 인류들에게 그 사진은 지구는 우주 속에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사는 먼지보다 더 작은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 이야기와 함께 김영하 작가는 인류를 푸른 별로 여행을 온 것에 비유한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그 사진을 보고 뉴욕타임스에 이런 이야기를 실었다고 한다.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 (rider)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함께 지구라는 구슬에 승선하여 여행을 하다가 다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한 종교에도 상관없이, ‘좋은 곳으로 갔다’라고 말하며 노잣돈을 챙겨주기도 한다. 우리가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도 저 드넓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인류와 여행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이야기하다가 책의 말미에 반려동물 이야기를 한다. 인류들의 여행과 개척이야기라고 느꼈던 책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운 결말은 내가 겪은 상실 이후의 어떠한 말보다 위로를 주었다. 평소에 독서를 하며 위로를 많이 받는 편임에도 봄이와 똘비를 잃은 후에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반려동물 이야기가 나와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우리는 모두 이 작고 푸른 구슬에 여행을 하러 왔다가 떠나는 존재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반려동물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빨리 떠나버리는 그들을 충분히 환대해주었다면, 그들에게 완벽한 신뢰를 주었다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는 푸른 구슬을 여행하는 동안 잠시 여행을 함께한 것이며 그들은 동행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먼저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나도 곧 다른 곳으로 떠나리라는 말과 함께. 함께 동행 했던 여행의 순간이 봄이와 똘비에게도 행복한 기억이 되었다면 나 또한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떠난 그곳의 여행이 행복한지,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또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을런지...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결국엔 사라진다. 나는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에서의 여행, 우리의 유한한 삶에 대해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구의 조각들과 우리의 근원인 우주를 그리며 상실의 경험 이후에 느낀 감정들에 대해서도 기록해보았다.
Q.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학부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며 작업을 하고 싶은 열망이 커졌어요. 좋은 작품들을 많이 알아갈 수록 내가 느끼고 본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짙어졌던 것 같아요.
Q.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파도의 힘있는 모습을 한동안 계속해서 그리기도 했죠. 요즘은 더 의미를 확장해서 우리의 근원인 우주와 지구 곳곳의 풍경들을 저만의 시각으로 표현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기존에 관심 있었던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 '도(道)의 작용'과 함께 거대한 자연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업을 해요. 제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커다란 자연 속의 일부인 '우리'라는 존재인 것 같아요.
Q. 주로 사용하시는 표현 방법과 스타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동양화를 전공했기에 전통 채색화 기법을 주로 활용해요. 석채를 써서 두께를 표현한 후에, 분채로 선명한 색감을 표현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최근에는 좀 더 다양한 표현을 위해서 과슈와 오일파스텔, 색연필, 연필 등도 함께 사용해주고 있어요.
Q. 가장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작품이 있으신가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 같아요. 작업을 계속하다보면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생겼다가도, 또 다른 작업을 진행하다보면 다른 작업이 마음에 쏙 들기도 해요. 아직은 완성형이 아니라 발전중이고 진정한 나의 작업을 찾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라 그런 것 같아요. :)
Q.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주로 여행을 하며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도시에 살다보니 제가 주로 작업하는 자연은 여행을 떠나야 만날 수 있더라구요. 요즘은 여행을 하는게 조금은 어려워져서 인터넷으로 자연의 모습들을 많이 찾아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로 지식을 얻어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보기도 해요. 특히 최근의 우주 작업들과 동물들은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아주 많이 얻고 있답니다. :)
Q. 앞으로 작업 방향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주 작고 푸른 구슬인 지구에 승선하여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 중 하나로서 지구를 살아가며 느낀 감정들, 관찰한 것들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지금부터는 주제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려나가며 제가 정말로 원하는 작업을 찾아가고 싶어요.
Q.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제가 작품의 주제를 선택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낀 감정들이 작품을 통해서 모두 다 전달될 수는 없겠지만, 관객분들께서 제가 느낀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제 그림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느끼실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Q. 작품 활동 외에 취미 활동이 있으신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혼자가면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여행을 혼자할 때는 최대한 핸드폰도 보지 않고, 시계도 안보고 자연을 관찰하며 걷는 것을 즐겨요. 그럼 자연과 제가 호흡하는 느낌이 들어 정말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또 여행을 가기 어려울 때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소설책이나 과학서, 심리학 책을 좋아해요. 아무래도 책을 읽으며 몰랐던 것을 알아갈수록 제 작업의 방향이 좀더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