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 박사
회화전공
박사
샌프란시스코예술대학교
순수미술학과 회화전공
석사
런던예술대학교, 윔블던예술대학
순수미술학과 회화전공
학사
안녕하세요. 동그란 이응으로 긍정을 이야기하는 김일지 작가입니다.
Q.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조금 시시하죠. 학창시절에는 작업하는 게 막연히 좋았던 거 같아요. ‘밤새 물감은 잘 말랐을까. 덧칠해놓은 부분이 울거나 흘러내리진 않았을까. 오늘은 위에 색을 더 올려봐야지.’ 이런 생각들로 아침이면 매일매일이 설레었어요. 사실 이제는 작업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침이면 작업실에 들어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라디오를 켜고 바닥을 쓸고, 머리가 맑을 오전 중에는 작가노트를 수정하거나 전시지원서 따위를 작성하다가, 오후 나절부터는 아슬랑아슬랑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게, 그러다 이따금 지치면 머리라도 식힐 겸 어기적어기적 산책이나 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라 딱히 크게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따분한 삶이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큰 작품을 만들고 삶을 이루고 또 예술이 되는 게 아닐까요?
Q.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 캔버스에는 수많은 동그라미가 빼곡히 채워져 있어요. 동그라미는 본디 문맥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데요. 도형 체계에서는 ○(동그라미지)만, 숫자 체계에서는 0(영), 영어 알파벳 체계에서는 O(오), 한글 자음모음 체계에서는 ㅇ(이응) 등이 될 수 있죠. 어렵게 들리나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 작품에 나타난 동그라미는 한글의 이응에서 온 것이에요. 저한테 이응은 긍정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답니다. 누군가의 부름에 응할 때나 상대편의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할 때 우리는 동의, 허락, 인정의 의미를 담아 ‘ㅇㅇ(응응)’이라 답하죠. 저는 항상 같은 물음에 답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외지 생활을 했어요.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소리를 낼 수 있는지 꾸준히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들을 긍정으로 바꾸고자 한 것 같아요. 이따금 《앙양엉영옹》으로 변주하기도, 《잉(-ing)》으로 진행하기도, 《이응》으로 자리매김하기도, 때로는 《아스라이》하게 남기도, 《오, 영, 이응, 동그라미》로 풀어지기도 했을 뿐이었죠.
Q. 주로 사용하시는 표현 방법과 스타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스킹 플루이드를 이용해서 아크릴로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추상표현주의의 어법을 따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제 작품이 의미하는 바에서는 큰 차이가 있어요. 마스킹 기법은 채색을 원치 않는 부분에 물감이 스며들지 않도록 막았다 이를 때어내는 방식으로, 보통 수채화에서 하이라이트 부분을 남겨두기 위해 쓰인답니다. 저는 이 기법을 캔버스 전면에 적용해 바탕칠로 형상을 지웠다가 다시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 밑에 파묻혀 있던 층을 위로 끌어올리거나 앞에 있는 층위를 배경으로 밀어내 형상과 배경 사이에 순서를 불규칙적으로 뒤바꿀 수 있는데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리기(painting)’를 ‘지우기(erasing)’와 ‘찾기(searching)’로 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기라는 행위를 위에 색을 얹어 더하는 것이 아니라 밑의 색을 덮어 지우거나 다시 파헤쳐 찾아내는 과정으로 바라본 것이죠. 그래서 제 작품 안에는 서로 다른 층위의 시간과 공간이 색층으로 나뉘어 얼기설기 교차한답니다. 어떤 층이 가장 먼저 칠해졌고 어떤 층이 가장 나중에 칠해졌는지 알아 맞춰보시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Q. 가장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작품이 있으신가요?
각각의 작품이 각기 다른 여정으로써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단면으로써 작가에게는 특별할 텐데요. 때때로 완성하는데 좀 더 오래 걸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마무리하는 작품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오픈 갤러리를 통해 공개한 작품 중에서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2018년 박사학위 청구전을 준비하면서 중압감에 절 애달게 했던 <Brutal Ieung>과 2019년 가창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 새로운 자극에 절 설레게 했던 <Aseurat>이 있을 것 같아요. <Hoyage>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빨리 완성해서 즉각적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던 반면 <날은 춥고, 바람은 불고, 까마귀 울어> 같은 경우는 완성하는 데 장작 2여 년이 걸리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고뇌를 함께 했죠. 저는 항상 모든 작품에 개별적인 믿음을 가지려고 해요. 각각의 작품이 서로 다른 기억들의 집약체로서 의미가 있죠. 작품을 마주할 때면 그 안에 내재된 기억들이 마치 영상처럼 펼쳐지곤 해요. 매 순간, 모든 선택이 고유하고 의미 있으니깐요.
Q.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대게는 자연과 일상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어떠한 한순간을 그 인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흩날리는 벚꽃, 이른 봄을 알리는 개나리, 들판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 반짝이는 호수의 물방울, 무더위를 씻어내는 소나기 같이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나 특정한 찰나에 특히 더 매료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자연 현상들은 통상적으로 인간의 의지나 개입과는 무관하게 고유의 법칙에 따라 일정 범위 내에서 늘 변함없이 질서정연하게 일어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자연 현상들 앞에서 항상 겸허해지더라고요. 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캔버스를 꼭 검은색으로 서너 번 꼼꼼히 밑칠해주는데요. 모든 색을 혼합했을 때 나오는 검은색으로 밑칠을 해준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자체로 완전한 소우주를 맞이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곤 해요. 저한테는 작품에 임하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건데요. 검은 캔버스 앞에 서면 자연 현상들 앞에서 느끼는 겸허함을 짧게나마 체감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꼭 의식의 일종으로서만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캔버스를 어두운색으로 밑칠해주고 밝은색으로 색을 올리면 색감을 훨씬 더 풍성하게 쓸 수 있죠.
Q. 앞으로 작업 방향은 어떻게 되시나요?
2020년 기나긴 학업을 마치게 되었어요. 2022년 저에게는 과분한 과제에 참여하여 작가로서는 조금 색다른 성과도 얻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창작 활동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근래에는 화성과 파주를 오가며 작품활동에 매진 중입니다. 저는 특히 공간과 빛, 소리에 많은 영향을 받는데요.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생활시설이 즐비한 화성 반월의 작업실은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분주하고 활기 넘치는 곳이에요. 반면 파주 출판단지 내 작업실은 조금만 걸어나가도 백로가 노니는 갈대숲과 늪지가 펼쳐질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랍니다. 두 곳을 오가며 작업하다보니 좀 정신이 분산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만큼 저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작품활동에 집중하고 있어요. 신기하게도 두 작업실에서 제작하는 작품의 성격이 서로 조금은 달라요. 각각의 공간에서 제가 느끼는 감정이나 빛이 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질량이 달라서 그런가 보아요. 기회가 된다면 그런 작품들도 좀 더 정리해서 공개하고 싶어요.
Q.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둥글게 둥글게’ 꼭지점도 모서리도 없는 동그라미처럼 그렇게 살아갈 순 없을까요? 뾰족하고 모난 것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부드럽고 유연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채우고 싶어요. 어쩜 이런 작가적 염원은, 저 스스로가 실은 너무나도 뾰족하고 모나서 많이 예민하고 유약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오랜 기간 학업을 이어오면서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들을 차츰 터득하고 싶어요. 조금은 너그럽고 무던하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길을 가보려고 해요. 동그란 굴렁쇠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며 스스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것처럼 저도 더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요! 동글동글한 이응이 가진 긍정의 기운으로 세상을 유연하고 따뜻한 기운으로 채울 수 있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Q. 작품 활동 외에 취미 활동이 있으신가요?
제가 생각보다 정말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라서 특별한 취미활동이랄게 따로 없는 것 같아요. 주로 산책을 즐겨합니다. 물감이나 마스킹 플루이드가 말라야 할 때는 대게 작업실을 벗어나 근처 공원을 걷거나 도서관을 찾기도 한답니다. 코로나로 이동의 제약이 있는 요즘이지만 모르는 도시를 지도 없이 거니는 걸 좋아해요. 혹은 아는 도시에서 모르는 길을 찾아 헤매보는 것도 즐겨한답니다. 처음 보는 가게를 기웃거려보는 것도, 새로 연 음식점에 첫 손님이 되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실패해도 괜찮아요. 이 모든 것이 다 기억의 한 장으로 남을 거잖아요. 한적한 중고서점에서 손때묻은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가판대에서 행적을 모를 물건들을 매만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걷다가 지치면 뒷골목 인적 드문 커피숍에 핸드드립을 맛보고 싶네요. 근처에 근사한 미술관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