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문학박사 광고홍보학 박사
집에서 작업실까지는 십여 분이 채 안 걸린다. 천천히 하늘을 보고, 길가의 나무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보낸다. 하루 종일 풀리지 않는 그림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어느 틈에선가 슬그머니 내 옆에 자리 잡은 녀석은 볼수록 정이 간다. 그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고 쉽지는 않지만 그림과 함께 보내는 날들에 감사하는 하루하루다.
해바라기의 조형미는 그릴수록 새롭다. 지난 전시회에서 우리의 바람을 담은 해바라기를 '해바람'이라 이름 지었다. 직선이 강조된 꽃잎은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꽃잎에는 색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흰색을 매치시켜 밝은 에너지를 가미했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중심부의 씨앗이다.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씨앗의 표현을 계속해서 고민하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꿈과 희망, 바람의 해바라기를 배치시켜 치유의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대자연과 사람이 만드는 정원 속 해바람은 우리를 또 다른 희망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나의 해바람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작하며 남은 생애 동안 건강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많기를 꿈꾸는 것이다. 씨앗의 수많은 점들을 찍으며 쏟는 나의 정성과 에너지가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힘을 지녔으면 하는 바람도 담아본다.
영원성의 중심에서 피고 지는 천일의 꿈, 해바람
-이희경(미술평론가)-
점, 선, 면의 합으로 구체화된 공간은 그 자체로 삶의 무대가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람의 집합체이다. 작가 고수영은 이 무한대로 뻗어나는 형형색색의 지향(志向)과 긍정의 에너지를 '해바람'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탁 트인 푸르른 바다 위 한 무리의 해바라기가 격정적으로 갈구하는 풍광은 저릿한 생명력을 함축하며 인간군상을 연상시킨다. 직선화되고 단순화된 개별성은 다채로운 색감으로 분화되어 한 무더기에 묻히지 않는 개성을 표출하고 있다. 그 자체로 바람의 아우성이다. 삶이 갈구하는 바람은, 그 누구도 온전히 가질 수 없으나 내려놓을 수도 없는 영원의 노스탤지어. 애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에 더해 간절한 기대와 설렘까지 품는다. 그것은 체험의 산물인 동시에 막연한 동경의 모체이다. 작가는 그 순간의 포효(咆哮)를 형상화하였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 결핍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의 상실(喪失)에서 유래한다. 충만함을 잃은 채 그곳에 대한 그리움만 남기에 낙원 밖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공허함을 품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결핍의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의 공간은 모양을 달리하며 삶의 희로애락을 보듬어 위안을 준다. 작가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긍정의 힘을 찾아내고, 그의 붓끝에서 추상화된 공간에는 한 무리의 해바라기가 생명력을 과시하며 풍성하게 나부낀다.
인간의 바람은 항시 욕망에 사로잡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신화 속 이카로스(Icarus)의 첫 날갯짓도 그저 자유의 갈망, 그것이었다. 그러나 바다와 태양 사이 아슬한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추락하고 만다. 그럼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 것인가? 태양을 향한 인간 염원(念願)의 그 끝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러한 위태 속에서도 오롯이 희망을 본다. 작가가 그리는 공간은 결핍과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 아닌, 휴식과 치유의 안식처이자 꿈의 산실이다. 이러한 공간이 존재하는 한 작가의 해바라기는 만개(滿開)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고수영의 진화(進化)는 공간과 해바라기의 관계성에 멈추지 않고, 힘의 결정체에 몰입한다. 세밀히 묘사된 종자(種子)는 그의 작품세계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해바라기 꽃잎 가닥가닥 응축된 힘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잉태한다. 이렇게 퍼져나갈 바람의 아이들, 그것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세계로 나아갈 근원적(根源的) 생명체가 된다.
삶이 영속하는 한 행복은 피어난다. 작가 고수영의 작품은 그 영원성의 중심에서 피고 지는 천일의 꿈, 해바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