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한국화전공
학사
중앙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미술학부 한국화전공
석사
깨울 수 없는 잠
글 - 박 소호
# 퇴각하는 이름들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이미지와 소리가 소비되는 시대를 걷고 있다. 같은 이름, 유사한 질감, 알 수 없는 얼굴들 사이에서 태어날 때 가지고 있었던 감정의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름이란 본래 너와 나의 구분을 위해, 우리를 묶고 엮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언어, 특히, 이름은 기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었고 유사와 복제의가 난무하는 오늘의 시간에서 스스로의 초상을, 고유의 목소리를 지우고 삭제한다.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이기를 포기한다. 우리가 지니게 된 작은 유리창 속에 흡수되어 질감은 마모되고, 밀도는 얇아진다. 0과 1만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인공의 형태와 형상은 상상의 시간과 가능성의 내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과잉과 범람의 공간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잉태할 수 있는 새롭고 무한한 이름을 퇴각하게 한다.
# 깨울 수 없는 잠
깊은 잠, 일과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정리 한 뒤에 이르는 안락한 잠, 무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잠은 많은 것을 품고 말한다. 쌓인 감정과 의식을 풀어놓거나 가까스로 숨겨 왔던 뒷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제의 회한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일에 도래할 불안과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채 우리는 매일 잠을 청한다. 작가 남여정의 작업은 깊은 내면의 얼굴과 얕은 포근함을 그려낸다. 뜨거운 욕조가 식을 무렵 미지근하고 아련한 수면처럼 낮잠이 올 때의 몽롱함, 이른 새벽 눈이 떠질 즈음의 미온의 공기가 느껴진다.
# 1 그리고 0
반복되는 작은 큐브, 그리고 일정한 반복이라는 구조와 시스템을 취하고 있는 남여정의 화면은 안정과 균형의 감각을 머금고 있다. 덕분에 표면의 담백한 질감과 그 사이를 유영하는 작은 붓질은 시선의 피로감으로 덮인 두꺼운 눈꺼풀을 자연스레 이완시킨다. 구체적인 이야기와 명확한 현장을 담아내지 않는 그의 화면은 무엇을 행하게 하는 방, 혹은 어떤 다른 생각과 명상으로 이끄는 통로가 된다. 그는 정지되고 고립된 이 세계에서 고요의 평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고요는 단순히 조용함과 적막을 향하지 않는다. 고요는 밤과 새벽, 깊고도 얕은 잠, 침묵과 해방을 향한다. 이 고요는 많은 사물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봉인하고 있는 오늘, 시간이 정지되고 좌표를 잃어버린 지금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인지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통로를 만들어낸다.
# 흩날리는 꽃, 빛무리
일정한 크기의 작은 박스가 반복되고 이 박스 안에는 규칙을 거스르고자 하는 작은 터치가 뭉쳐있다. 얼핏 보면 반도체의 표면과 닮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질감은 한지 특유의 포슬포슬한 텍스처를 발산한다. 나열, 얽힘, 반복으로 대변되는 이 격자의 구조는 연속되는 하루, 여지없이 다가오는 안녕, 매일 맞이하는 밤과 낮을 은유한다. 한정된 시간과 중력이라는 물리법칙에 묶여 있는 우리에게 반복에 대한 인지는 고립하게 되고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작가 남여정의 작업 안에서는 몰입, 집중, 쏠림을 소환하는 공간이 있다. 여러 단위로 흩어져 있는 단어와 기호, 이름은 서로가 서로에게 흡수되어 동일성과 공동체의 세계에서 유일한 이름과 하나의 사물을 만들어낸다. 여러 개로 흩어진 다중시점을 하나의 소실점으로 끌어모은다. 그의 화면은 시간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는 이름을 태어나게 한다. 추운 겨울,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눈꽃이라 부르고, 봄에 흩날리는 꽃을 보고 눈발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내일에 대한 기대와 자연스레 이르는 평안하고 안락한 잠의 구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