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시를 좀 쓴 죄로 글쟁이가 되었으나 최근 그림책을 두어권 출간하고, 이젠 간덩이가 부어 자신이 글쟁이인지 그림쟁이인지 헷갈리고 있을 만큼 그림에 빠져, 아니 그림에 미쳐 아예 전업화가로 나가볼까 엉뚱한 망상에 빠지 염세적 낭만주의자!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때 시집을 내고 등단했으나 그림에 관심이 많아 글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늦깍이로 미대를 한번 가볼까 생각한 지가 10여년 째인데 앞으로 20년쯤 더 생각만 하다가 결국 못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 미대를 못 나온 한을 좀 풀려고 독학으로 공부하다 약간의 저작물을 집필했다. 미술인문교양서 <우리 화가 우리 그림>(학고재), <한눈에 반한 미술관>(사계절, 초등 교과서 수록도서) 시리즈, <세상 모든 화가들의 그림 이야기>(꿈소담이) 등을 비롯하여 창작그림책 <엉터리 집배원> <엄마도 처음> <호랑이를 죽이는 방법> 외에 수많은 저서가 있다.
Q.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려서 만화와 공룡을 좋아했다. 크면 막연히 공룡을 그리는 만화가가 될 줄 알았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멍 때리기를 즐기던 꼬마는 커서 엉뚱하게도 글쟁이가 되었다. 못다 이룬 꿈이 아쉬워 오랫동안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거지 눈엔 밥만 보이고 송충이 눈엔 솔잎만 보이다는데 어딜 가나 내 눈에 그림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어 족보에도 없는 그림을 무턱대고 좋아서 혼자 그려댔다. 근래 호일아트(은지화)라 제멋데로 이름붙인 새로운 그림 양식에 중독되어, 허구헌날 붓질을 하느라 날밤을 새고 있다. 아울러 은지화 미술 동아리 <어울림 그림마당>을 운영하고 있다.
Q.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술은 세계를 창조한다. 화면은 나의 창세기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화면은 태초의 세계다. 그 세계 앞에서 붓을 든 화가는 조물주와도 같다. 나무와 새를 그리면 자연이 창조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면 인간의 역사가 생성되고, 해와 달과 별을 그리면 우주가 창조된다.
조물주가 되면 고뇌 또한 많아진다. 새를 한 마리 그릴까, 두 마리 그릴까? 산을 겹쳐 그릴까 아니면 펼쳐 그릴까? 해를 그릴까, 달을 그릴까? 나무를 하나 그릴까, 여러 개를 그려 아예 숲을 만들어버릴까?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의 기록이 성경 속 창세기라면 내 그림은 내가 조물주가 되어 창조한 세계의 기록, 즉 나의 창세기다!
그렇게 창조한 그림 세계는 다채롭고 풍성하다. 동화적 환상의 세계도 있고, 팝 아트나 낙서 그림 같은 세계도 있고, 형상을 파편화시킨 입체주의나 내면 깊숙히 가라앉은 무의식적 초현실주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은 것처럼 내 그림 속에 잠든 화가 역시 많은 모양이다. 이중섭, 장욱진, 김득신이 있는가 하면 루소, 바스키아, 피카소, 마그리트, 렘브란트, 라 투르도 있다. 이들이 다투지 않고 살가운 이웃이 되어 내 작품 속에 살기를 바랄 뿐이다.
Q. 주로 사용하시는 표현 방법과 스타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은지화 작업은 독특하다. 이는 수채화, 유화, 판화처럼 하나의 새로운 그림 양식이라 부를 만하다. 은지화를 간단히 설명하면 우리가 흔히 쓰는 주방용 쿠킹 호일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중섭의 담배 은박지 그림에 착안하여 개발한 독창적 미술 기법이다. 호일에 한지를 배접한 다음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올리면서 스텐실 기법, 물방울 기법 등 다양한 독자적 기법을 써서 완성하는 그림이다. 실제 작품을 보면 종이나 캔버스 그림과 달리 아주 묘한 질감과 색감이 난다. 처음 개발할 때는 공정이 좀 복잡했지만 지금은 단순화시켜서 누구나, 심지어 초등생이나 유아까지도 쉽게 따라그릴 수 있다.
Q. 가장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작품이 있으신가요?
화가들이 작품을 판매할 때 '시집보낸다'는 말을 간혹 쓴다. 곱게 기른 자식을 보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어느 작품이든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 같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아픈 손가락에 더 마음이 쓰이듯 실패한 작품일지라도 애착이 간다. 아니, 어쩌면 그 실패물이 더 귀할 가치를 가질지 모른다.
지금의 은지화 작품은 성공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실패작일지라도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따라서 은지화의 진화 과정에 있어서는 실패작 또한 더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산인 셈이다.
Q.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어디랄 것 없이, 모든 게 다 영감의 원천이다. 생생한 삶의 경험은 물론이고 책을 읽거나 길을 걷거나 TV를 보거나 전시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등등 어느 때건 불쑥불쑥 영감이 찾아들곤 한다. 다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원천은 유년기의 기억이다. 충청도 산골 태생이라 하늘만 빠꼼한 곳, 교통수단이라곤 머리 위를 오가는 비행기만 보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내 그림에는 늘상 산, 나무, 새 같은 시답잖은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항문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유아기적 감성에 갇혀사는 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것이 동화적 환상의 세계와 감성적 울림을 자극하는 작품의 원천이 되고 있다.
Q. 앞으로 작업 방향은 어떻게 되시나요?
은지화는 현재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화 중이다. 종이와 캔버스를 놔두고 왜 굳이 은지화를 그리냐는 말을 듣곤 한다. 답은 간단하다. 그것들과 질적으로 다른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은지화를 하다 보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치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가의 심정이 된다. 예컨대 뒷동산인 줄 알고 올랐는데 히말라야 산맥 같은 게 버티고 선 듯한 느낌이랄까?
은지화를 시작한 지 십여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기법적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이 실험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이게 끝인가 싶으면 뜻하지 않은 우연의 효과가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한다. 내 평생, 이 탐험 혹은 실험이 멈추지 않을 듯 싶다. '평범이 곧 위대'라는 말이 있다. 평소 삼겹살 구워먹을 때 쓰는 평범한 주방호일이 미술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Q.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동화적 상상의 세계를 자주 탐험한다. 그 세계는 꽤나 시적이다. 동양에는 그 유명한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정신이 있다. 문인화의 비조로 꼽히는 왕유의 말로써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뜻이다. 서양 또한 '회화는 말없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평한 고대 그리스 시모니데스의 회화 정신이 있다. 둘 다 늘 금과옥조로 섬기는 말이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련한 동화 속 같은 이미지로 말하는 소리없는 시, 내가 지향하고 싶은 그림세계다.
Q. 작품 활동 외에 취미 활동이 있으신가요?
판소리, 택견, 기타, 단소 등 다양하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혼자 하는 일이라 고독하다. 세상과의 소통의 공간이 필요해서 여러 가지 취미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현재는 은지화 미술 동아리 <어울림 그림마당>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Q. 작품 활동 외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없다. 지금은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형상이 있으되 형상이 없는 것 같고, 형상은 없으되 형상이 있는 것 같은 지극한 경지의 작품을 그리는 일은 저 밤하늘의 달과 별처럼 아득히 높고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