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최첨단 초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사업을 통해 기존의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세련되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공간은 역사와 기억과 사람 냄새마저 없는 진공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현실 속에 우리는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며, 그 사연들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박용일 작가는 풍경을 보따리 안에 담아내어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다. 보따리는 자본의 흐름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야 했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과 현실을 상징한다. 짐을 싸고 풀어야 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본의 감각 속에 무뎌진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환기하게 된다.
보통 박용일 작가의 작품에는 보따리 겉면에 오래된 주택, 가로수, 거리를 지나는 행인, 버스 등 일상적인 도상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쩐지 구체적인 내용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원색의 유화 물감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지, 왜 짐을 싸게 되었을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상해볼 수 없습니다. 반면, 그러한 이야기들을 삼켜버리듯 강한 시각적 자극을 주는 붉은색이 배경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더욱더 보따리를 싸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서민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그들에 대해 알고 싶게 합니다. 원색의 강렬한 대비와 그 이면에 놓인 이야기를 함께 느끼고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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