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91x116cm (50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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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과 <모든 게 사라진 건 아닌>, 그리고 <화>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불이다. 불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을 파괴하고 앗아가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불에는 생명과 죽음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 인류에게 있어 불은 밤을 밝히고 음식을 풍부하게 하고 도구의 발전을 가능케 한 것으로 인간 문명 발달의 핵심 요소였다. 강렬한 생명력이나 에너지, 열정 등을 보면 우리는 '타오른다'라고 말하고, 축제나 의식에서도 불은 거의 늘 등장하며, 심지어 불타고 난 땅은 더 비옥해져 다음 생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촛불을 켜 무언가를 염원하기도 하고, 특정 문화권에서는 고인의 시신을 강물에 띄워 화장하는 형태의 장례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불은 한 가지 형체를 연소시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무언가로 전환시키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겠다. 연기는 하늘로 흩어져 자유로워지고, 불타고 남은 재는 땅으로 스미어 다시 생명을 키우는 대지의 일부가 되는 이 연소의 과정은 지나간 것들과 남은 것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것들까지 모두 크게 순환의 고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영희 작가는 이런 정교한 자연의 섭리, 순환의 의미를 화염에 담아 담담하고 은근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다.
추천 이유
작품에서 등장하는 화염은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영희 작가는 인도를 여행하던 중 갠지스강에서 생명이 생동하는 삶의 현장과 죽은 자를 화장하는 장례의식을 함께 보게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이는 이후 가까운 가족의 죽음과 출산 시기가 맞물렸던 경험과 연결되어 작가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자 하나의 순환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입니다. 작가는 과거에서 현재가 순차적인 현상이 아닌 동시다발적인 현상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생명을 태우지만, 또 다음 생명의 밑거름이 될 화염이 춤추는 모습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근원적인 구조를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영희 작가의 작품들을 잠시 감상하시며, 지나간 것들과 남은 것들, 그리고 모든 생명이 순환하는 섭리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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