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사이가 연동되는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용일이 수년전부터 그리고 있는 것은 보따리이다. 이전 세대에서는 보따리가 책가방으로도 쓰일 만큼 일상적이었지만, 포장재로서의 보따리는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랩이나 비닐봉지 같은 것이 보따리를 대체했다. 일상에서 사라질 즈음의 물건들은 특별한 자리에 다시 나타난다. 요즘 보따리는 명절날 선물세트 등을 포장하는 등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다. 그러나 보따리는 우리의 일상어에 여전히 남아있다. 가령,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전국을 떠도는 대학 강사를 ‘보따리 장수’라고 하고, 조직에서 누군가를 쫒아낼 때 ‘보따리 싸라’로 명령한다. 박용일의 보따리 그림들은 그가 살고 작업하고 있는 수도권 안팎의 재개발지를 비롯하여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소재로 했던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너진(또는 무너질) 풍경 이미지가 접혀 만들어진 종이배들은 정처 없는 유랑을 상징했다면, 보따리는 유랑하는 자들이 꾸렸을 짐에 해당된다. 종이로 접혀진 배, 천으로 주름진 보따리는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것은 안과 밖이 연동되는 유연한 평면으로서의 공통점이 있으며, 일상의 무대를 넘는 시공간으로 확장될 잠재력을 가진다. 20세기 초 몽마르트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집결 촌을 ‘세탁선(Bateau Lavoir)’이라고도 불렀듯이 집은 배와 비교된다. 배는 움직이는 집이다. 종이배는 극히 취약한 집인 것이다. 집이 인간의 연장이라면 보따리는 보다 직접적이다. 모든 유기체들이 조만간 어떠한 막에 싸여진 덩어리라면, 보따리들은 인간의 몸, 특히 얼굴을 떠올린다. 대개 한 화면에 배경도 없이 하나씩 그려져 관객과 대면하는 그 덩어리는 은유적인 초상이다. 어수선하게 풀어헤쳐진 보자기, 즉 해체되고 있는 유기체는 치명상을 입거나 피로한 몸체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그것은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엘리자베스 그로츠), ‘기관 없는 몸’, ‘다양체’(들뢰즈) 등으로 개념화되면서 부정적 기운을 떨쳐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유기체와의 비유에서, 보따리 위의 나목 잔가지들은 인체의 일부, 즉 혈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드물게는 보자기가 두 개 놓이기도 하는데, 그때는 사람 같은 모습이 더욱 강하다. 박용일의 보따리 그림들은 그 보따리를 싸고 떠났을 인간들처럼 다양한 표정, 특히 멜랑콜리한 표정이 있다. 체액을 떠올리는 물감 흘린 자국이나, 밑이 쑥 빠진 형태, 흐트러진 윤곽선 등을 보면, 비극으로 귀결되곤 하는 삶의 중력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그저 예쁜 스카프 무늬를 보든 기괴한 이미지를 보든, 음울한 감성에 젖든 그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작가는 더 이상 (재)개발공화국인 한국의 현실을 고발하는 류의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He-story; in and out’(전시부제) 전의 은유적 형상들은 그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보다 안쪽, 또는 더 머나먼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재는 더욱 미시적 세계로 이동했지만 은유의 폭은 더욱 커졌다. 그의 최근 작품은 일상의 풍경부터 우주론적 경관까지 아우른다. 실제 오브제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품은 계열을 이루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를 한다. 사각형 평면인 보자기에 출력된 현실의 이미지는 보따리를 통해서 급격하게 변형된다. 보따리는 수평적으로 펼쳐진 풍경을 소용돌이치는 듯한 형태로 변화시킨다. 박용일의 작품에서 보따리는 떠남을 상징하는 서정적인 사물이기 이전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어떤 압축된 힘을 표현한다. 통째로 묶여 이동되는 현실에는 (탈)근대적 의미의 ‘시공간의 압축’(데이비드 하비)이 발견된다. 우주적 공간을 떠올리는, 블랙이 많이 등장하는 최근 작품에서 그 힘은 현대물리학의 가설과 연관된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미시와 거시 우주 사이에,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세계화 시대에 대한 비유가 있다. 경계가 소멸된 ‘평평한’ 세계에서 어디로든 진출하는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다니는가는 그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목’으로도 포장되는 지구 촌 전체가 보따리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