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가 회화로서 작품을 구성 연출하는 방식은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이를 드로잉 해보고 그 자신도 어떤 풍경 안 구성 요소로 들어가거나 별도의 초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얘기해 보면 사실을 전달하는 서사구조의 재현 풍경 같지만 선으로 일렁거리는 형태를 만들고 물감 층이 화면 가득할 때 말로 설명되지 않는 추상의 성격을 갖는다. 모호한 성질의 작품 안 풍경은 명확하지 않아 회화의 공간은 더욱 힘을 발휘한다. 조형성의 좀 더 비중을 둔 것인데 이는 캔버스의 공간 앞에서 눈앞에 현실을 담아내기보다 지나간 것들을 기억의 두고 촉발적인 감성이 자연스레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이런 현재의 시점 작가의 작품이 나타나기까지 예술의 장르 안에서 미메시스mimesis란 사실을 전달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뒤로한 창작인의 생각, 감성이 만나 보이지 않는 흐름이 뒷받침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얘기해보면 근대시기 세계대전이 두 차례 지나가고 종교로 시작된 로고스 역시 사라진다. 보이지 않더라도 굳게 믿고 있던 신념이 사라진 이제 현상 앞에 실존이 먼저이고 극복하면 된다 이야기 한 사르트르의 선험은 개인의 고독을 전제로 한다. 삶의 지속된 순간으로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배경 뒤에는 자본주와 연결된 산업사회가 개인의 고독과 더불어 감성을 부추긴다. 다시 작가의 지나간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늘 화면을 가득 채운다. 넘쳐나는 사물들 대부분 자연을 근거로 꽃이 많으며 구도는 자유롭게 화면을 부유하는 방식으로 안료는 있으나 마티에르는 거의 없다. 가득 찬 형상과 물감층의 어울림을 생각해 보면 안료가 두텁게 올라올 수도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금도 여전히 일렁거리는 형상 덕분에 편안함보다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무심코 떠올릴 수 있는 상식적인 말로 ‘강하다’, ‘우울하다’. 말을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실체가 없는 정서적 느낌에 주목한다. 재현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확인하는 자리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작품상에 함께 풀어내는데 여념이 없다. 무엇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닌 개인과 다른 이간의 관계형성으로 우연과 필연이 섞여 생겨난 현실의 기억을 무심히 떠올려 작업해 왔다. 살면서 오는 감정들을 회화로서 객관화시켜 보고 확인하는 자리로 지나간 사건이나 대가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차용, 중첩시킨다. 자연, 꽃을 지나 행동 양식인 '가리다, 숨기다'는 말로 정의되는 능동과 수동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짧게는 어제, 오늘, 지나간 시간, 길게는 중세시대까지 간극을 통해 바라본 파토스Pathos다. 여기에, 그곳에 무엇이 존재했었다. 내면에 자리한 감성의 분할로 명확하지 않지만 그 무엇을 느끼는 개인, 다른 이 간의 문명의 소통이라 볼 수도 있으나 작가가 바라보고자 한 것은 거시적이고 미시적 관점이 혼재된 양상들 안에 자신을 드러냄이다. 작가의 ‘미끄러진 풍경’ 이란 이런 다양한 것들을 작품으로 녹아들게 한 결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유기체적 흐름이 공존한다. 최근 자신의 일상을 한층 더 반영시킨 작품들은 우울함 보다 평범함을 더한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조형 요소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구도로서 부분적으로 끌어들이고 객관화시킨다. 여전히 거칠고 우울함이 있으나 사람 간의 교류되는 이야기로 그 틈 안에서 느끼는 개인의 감정들을 가감 없이 화면의 주된 내용으로 끌어올린다. 다수와 개인 그리고 사회 울타리가 되어 주는 국가까지. 지켜야 할 신념과 욕망, 선택해야 할 것들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이 있으며 끊임없이 숙고해야 하는 반복되는 과정이 함께한다. 결국 작가가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일상을 전제로 예술과 삶의 경계는 없으며 삶이 지속되는 한 사유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들과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의 대해 생각하고 흔적을 남기는 과정으로 재현은 포함된다. 이것이 롤랑 바르트의 주체적 상실이며 끊임없이 숙고하는 메를로 퐁티의 몸으로 무심코 받아들인 의식의 공간이고 랑시에르가 말한 이미지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