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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혼자 가는 먼 집

갤러리도스   I   서울
박지수의 노스탤지어, 이름 붙일 수 없는 풍경

윤상훈 <예술학, 독립 큐레이터>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대한민국의 미술계 안에서도 최근 십 여 년간 변함없이 작가들에게 일관되게 요구되는 태도는 바로 관객과의 소통과 공감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들에게는 명확한 주제의식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고, 나아가 시대에 맞는 주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더 이상 그것의 최종 결과물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과 작가의 철학이나 메시지부터가 예술 활동의 시작점이고 나아가 더 중요한 지점이라고 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예술, 그러니까 다시 말해 기술로서의 예술, 아름다움으로서의 예술이 철저히 부정당해도 옳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만을 창작하도록 강요 받는 이유는 당연히 미술계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전시 공간, 평론가, 기획자들이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들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예술가들에게는 성역의 제한 없이 스스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 테다. 하지만 학교와 미술계는 급변하는 시스템 안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방황하지 않고 하루 빨리 제자리 찾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가 자율적으로 연구하고 고민하여 점차 성장하게 하는 방식이 아닌 미술계의 흐름이나 요구에 부합하는 결과물만을 만들어 내기를 종용한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작가가 작품에 제시한 기표를 근거로 그것의 기의를 끊임없이 묻는 행위이다.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는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로서 기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가리킨다. 기표란 기호가 나타내는 물질의 형태로써 예를 들어 ‘집’이라는 기호에서 ‘집(ZIP)’이라는 문자와 음성을 일컫는다. 반면 기의는 기호가 지시하는 개념이다. ‘집’이라는 단어를 볼 때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것의 이미지와 개념, 혹은 의미가 바로 기의이다. 소쉬르의 기표, 기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안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로 기의라는 것이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특정한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집’이라는 기표가 제시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특정한 누군가의 집이나 스토리가 있는 집이 아니라 그야말로 일반의 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기표가 반드시 하나의 기의 하고만 연결 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기의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반대로 하나의 기의가 다수의 기표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이라는 기표는 어느 지역의 집, 누가 사는 집, 단독주택, 아파트 등을 의미할 수 있고 또한, 단골 카페, 직장, 따뜻한 공간 등도 ‘집’이라는 기의를 표현하는 기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금의 대한민국 미술계에서는 예술가들에게 바로 이 기의를 기반으로 한 기표의 표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회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여지없이 기의 없이 단순히 기표만을 제시하는 창작 행위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해왔다. 물론, 이러한 미술계의 태도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필자 또한 현장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기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지수의 방식은 어떠할까. 그녀의 작업 또한 어떤 기표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기의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박지수 작업의 변화는 대충 세 단계로 구성된다. 2013년부터 2015년 전반부까지 진행된 ‘창백한 풍경’ 연작, 2015년 말에 제작하기 시작했던 ‘폐가’연작, 그리고 현재까지 진행중인 ‘빛’ 시리즈가 그것이다. (작품 형식에 따른 분류는 필자가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창백한 풍경 연작에서는 그야말로 작가가 주목한 대상을 제외하곤 모든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그래서 ‘풍경’이라고 부르기 조차 민망한 죽어가는 자연이 중점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안개가 화면 가득 끼어 있거나 잔뜩 흐린 날씨 탓에 꽃들은 명확한 종류를 가늠하기 힘들다. 시커멓게 그을린 마치 드라이 플라워 형태로 말라 비틀어진 꽃들은 곧 사그러질 듯한 아슬한 생명력만이 존재한다. 한 겨울의 모습은 아닌 듯 유추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무들은 수분을 잃은 채 메말라 있다. 풍경은 작가에게 있어 피난처이자 위로의 공간이며 동시에 작가 자신이 이입된 자화상이다. 작가의 삶에서의 상실과 상처들은 작가로 하여금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탈출구의 역할로 풍경을 사용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의 도피처로서의 풍경은 역설적이게도 꽃이 만발한 화려한 자연이 아닌 사라져가는 듯한 풍경, 죽어가는 듯한 풍경들이다. 이러한 창백한 풍경은 작가에게 상실과 죽음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의 풍경으로 해석된다. 이미 모든 것이 성장하여 풍성한 자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명력을 상실해 갈 순간만을 간직하고 있을 테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생명을 바라보는 작가는 그것이 되살아 나리라는 희망을 갖을 수 있게 된다. 현재의 상황 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방식이 작가가 현실을 도피하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2015년 말이 되면서 박지수는 표현과 기법의 다양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결과물을 선보였다. 이전의 작업들이 지나치게 주관적 심상표현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 결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사실적 형태의 작업들이 등장하게 된다. 결과물만을 놓고 본다면야 초기작업들이 지니고 있던 섬세한 감정선이 사라져 버리고 평범한 리얼리즘 성격의 회화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 변화의 과정을 필자는 상당히 바람직하게 본다. 이후 한층 정리된 근작이 나오게 된 필연적인 과도기적 시기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 스스로도 표현방식에 있어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폐가는 현대사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최종적인 배설물이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공간이었을 이 폐가들은 대부분 더 나은 곳으로의 이주와 함께 버려진다. 어떤 맥락에서 본다면 폐가나 버려진 장소들은 무한한 욕망을 재생산 해내는 현대인들에게 조차도 더 이상 욕망의 대상으로 보여지지 않는, 그야말로 그것을 가지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는 어떠한 의욕조차 발견할 수 없는 순수함의 결정체로서의 버려진 것들이다. 물론, 박지수의 풍경 작업은 자연이라는 대상으로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적 풍경 혹은 인간의 풍경으로 제한 없이 확장이 가능하다.

근작들은 죽어가는 자연을 조망하기 보다는 해질 무렵, 혹은 동틀 무렵의 하늘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자연의 색은 여전히 변함없이 어둡고 무채색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색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빛을 머금은 태양은 지금 떠오르고 있거나 혹은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현재에 대한 명확한 규정보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며 변화된 사실적 표현방식은 초현실주의적인 화면 구성과 채색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로 실재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비춰진다.

박지수의 작업들은 시기에 따라 표현에 있어서는 분명 명확한 차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업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모두 그 궤를 나란히 하고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거대 자본에게 억압받는 절대적 약자인 개인, 그리고 집단으로부터 느끼는 개인의 고독과 자아의 상실, 결국 가족의 붕괴로 이어지는 현실. 작가는 이러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내제한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가 자아를 치유해 준다고 믿고 있다. 그것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캔버스에 옮기는 행위를 통해 치유가 되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등돌림 당한, 버려진 나 자신보다도 더 처절한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꺼져가는 생명력을 꼭 붙잡고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메마른 꽃나무 한 그루에서 ‘살아보리라’라는 희망을 발견했을 테다.

여기서 다시 처음에 언급했던 기표와 기의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수의 작업에 대입시켜 해보자. 일반적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표현된 기의가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지극히 보편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의를 지닌 기표가 제시 될 때 쉽게 해석이 되고 공감이 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박지수의 경우 비관적 상황의 대표적인 클리셰라 할 수 있는 폐가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안락한 삶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의 삶의 범위를 한정 짓는 것이 아닌 미련을 버리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라는 의미로 폐가가 사용된다. 말라 비틀어진 꽃나무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곧 다시금 살아 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방식이다. 박지수의 경우처럼 작가 입장에서는 분명 명확한 기의를 갖고 기표를 제시했지만 그 기표가 관객에게 보편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경우 대부분의 관객은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작가의 기표와 기의를 모두 이해하는 극소수의 몇몇 관람객, 다시 말해 작가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환경에 처한 특정 관객이 받게 되는 강렬한 감동은 실로 대단하다.

이것은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주장했던 스투디움(stadium)과 푼크툼 (punctum)적 이미지 해석법에 적용되는 방식이다. 이미지를 통해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스투디움이라 부른다면, 반대로 푼크툼은 보편적이기 이전에 관객의 개인적 경험이나 성향, 취향 등과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이미지를 접했을 때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보고 스투디움을 경험했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여 작가가 노렸던 결과에 순응한다는 말이 된다. 작품을 감상하고도 스투디움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관객은 아무것도 얻어가는 것 없이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되고 만다. 이것이 결국 처음에 필자가 이야기 했던 한국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요구하던 사항이다. 스투디움의 표현이 없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투디움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본질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푼크툼은 이미지를 보는 이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경험을 동원하여 이미지를 관객 스스로 재구성해 나가게 해준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 푼크툼만이 부각될 경우 물론 대중의 보편적 동의를 얻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스투디움만이 존재할 경우 이것을 작품에 대한 관람객의 권리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독해를 방해하게 한다. 관람객의 예측을 뒤흔드는 박지수의 이미지 삽입 방식은 철저하게 바로 이 푼크툼적 해석에 부합하고 있다. 이 지점이 이제 막 첫 발을 내딛는 박지수에게 필자가 많은 것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관람객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 기표를 만들어 내는 작가들은 이미 많다. 하지만 박지수의 경우처럼 이미지를 보는 관객에게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젊은 작가들은 흔치 않다. 게다가 박지수의 모든 작업들은 보편적인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을 근거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 오로지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부터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사실은 당연히 그녀의 어떤 기억들이 작품을 통해 등장하게 될지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기억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에 놓여있는 대상이지 않는가.

전시 정보

작가 박지수
장소 갤러리도스
기간 2018-01-10 ~ 2018-01-16
시간 12:00 ~ 18:00
월요일 오후 12:00~ 오후 18:00
화요일~일요일 오전 11:00~ 오후 18:00
휴관일없음
관람료 무료
주최 갤러리도스
주관 갤러리도스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737-4678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갤러리도스  I  02-737-4678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7길 37 (팔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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