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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개인전 <百世淸風: 바람이 일어나다>

가나아트센터   I   서울
‘바람이 일어나다’ 혹은 김병기 百壽 개인전

윤범모, 미술평론가

1916년생, 올해로 만100세, 노익장의 주인공은 바로 김병기 화백이다. 쉽게 말해 평양 출신인 그는 이중섭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이다. ‘신화’ 속의 화가와 동창생이라니,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머나 먼 길을 돌아 온 화가, 그가 신작 중심으로 창작 발표전시를 갖는다. 한마디로 백수(百壽) 기념전이다. 백수에 신작 개인전을 개최하다니! 놀라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백수 개인전, 이는 국내 미술계에서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어쩌면 국제무대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일일 것이다. 그만큼 이번 전시는 각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아니, 작가의 나이만 주목할 것도 아니다. 작품 내용이 젊고 또 사뭇 치열하기 때문이다. 창작의 혼은 살아 훨훨 불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이색전시의 차원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김병기 화백은 서양미술 수용 초기 단계에 활동한 김찬영 화가의 후예이다. 그러니까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이라는 1910년대의 선구자적 유화가 반열에 오른 가문의 후예라는 뜻이다. 김관호와 김찬영은 평양미술계를 일군 선각자가 아니었던가. 화백은 도쿄 유학시절 문화학원과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등에서 진취적 미술운동과 가깝게 지냈다.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 등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식민지시절을 거쳐 남북분단 시기에 그는 김일성 정권의 초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월남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이어 서울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의 대표로 활동했고, 1960년대 중반 뉴욕에 정착했다. 도미 이후 20년의 세월이 망각 속에서 흘러갔다.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체류중이던 나는 사라토가 자택에서 화백과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중간역할로 화백은 ‘드디어’ 귀국 개인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화백은 외지에 묻혀 지내는 화가의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평양, 도쿄, 서울, 뉴욕, LA, 그리고 서울, 화가의 생애이다. 근래 화백은 영구 귀국했고, 국적을 회복했다.

바람이 ‘인다’와 ‘일어나다’의 차이

‘바람이 일어나다’라는 말은 이번 개인전에서 중요한 테마이다. 이는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의 그 유명한 <해변의 묘지> 첫 머리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 그런데 바람이 ‘일어나다’라는 표현, 뭔가 역동적이면서 울림이 다르다. 여기서 바람이 ‘일어나다’라는 표현은 평양식이다. 서울말은 ‘바람이 인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은 형식을 존중한다면 평양은 형식을 낳게 하는 리얼리티를 존중한다. 리얼리티라는 말은 근래 화백이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열쇠말이다. (그는 레알리테라고 발음한다.) 그러고 보니 화백의 주요 작품 제목은 시 구절과 친연성이 많음을 알게 한다. 귀국 초기의 작품에서는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볼 수 있었다. 즉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여전하다”라는 당나라 시 구절의 인용이다. 그리고 <골짜기에 돌아오다>는 T. S. 엘리엇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화백의 중요시기에 등장되는 명시의 구절, 이는 화백의 문학성을 암시한다. 문학적 서사구도는 화백의 조형논리와도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의 ‘간판 작품’인 <바람이 일어나다>를 살펴보자. 첫 인상은 무엇보다 역동적인 붓 터치, 그것도 수묵화를 보듯 새까만 색깔의 바탕에 하얀 선들, 뭔가 울림이 강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화면 전체를 덮은 흑색과 그 사이의 백색 선은 물론 ‘바람’을 상징할 것이다. 그것도 일어서는 바람, 일어서는 바람은 바로 역동성의 대체어와 다름없다. 화백은 ‘이야기가 없는 그림’은 죽은 그림이라고 단정한다. 비록 추상적으로 표현할지라도 뭔가 이야기를 담아야 작품이 된다는 주장이다. <바람이 일어나다>는 그 다음 구절 <살아야 한다>로 이어지면서 스토리텔링으로 연결시켜 준다. 이 작품은 까만 바탕과 더불어 양측의 상하로 기다랗게 내리 그은 직선의 빨강색 띠가 눈길을 끈다. 빨간 띠. 이는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朱雀)의 색깔과 연결된다. 강서대묘 사신도의 주작, 이 주작은 무덤 남쪽에 역광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무덤에 들어서서 눈이 익으면 주홍이 빛난다. 화백은 평양시절에 김만형과 평양 근교의 고분벽화를 답사했다. 화백의 조형논리에 고구려적 요소가 있다면, 이는 고분벽화와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고구려 미술의 특징으로 역동성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럴까. 화백의 작품에서 선(線)이 강조되는 것, 그것도 속도감 있는 선, 이는 고구려 벽화와의 친연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중섭의 속도감 있는 선도 고구려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이 일어나다>는 여백 사이를 뚫고 비상하는 바람, 그것도 묵직하게 치솟아 오르는 바람, 21세기 한국인에게 주는 화백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직선과 속도감과 리듬

도시로 상징되는 현대사회는 ‘직선’이다.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의 변화는 ‘곡선에서 직선’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경제적 급성장을 보인 남한사회의 도시풍경은 ‘직선의 홍수’이다. 오랜 기간 해외생활을 한 화백의 눈에 비친 고국의 모습, 그것은 무엇보다 직선의 풍경이었다. 노년기의 곡선과 같은 산의 능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직선의 도로와 빌딩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기야 도미 이후 미국사회에서 느낀 감회 역시 직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화백은 수십 년 동안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 직선적 요소는 현대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시각적 리얼리티는 직선이다. 화백이 제작 중 자(尺)와 테이프 등을 활용하는 것은 리얼리티의 구현과 맞물린다.

직선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정확한 직선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직선 같지만 완만한 직선 혹은 곡선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직선도 많기 때문이다. 직선적이지만 굽은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전통 건축의 지붕처럼 완만한 ‘곡선적 직선’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대나무 잎은 직선이자 곡선의 리듬을 갖고 있지 않은가. 어떤 묵죽화가는 댓잎을 칼날처럼 보이게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면(面)의 경계는 선(線)이다. 선의 모음이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전통미술 가운데 사군자 장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사군자는 선(線)의 미술이다. 화백은 사군자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긴다. 선을 중심으로 일군 그림, 화백의 작품 속에서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화백은 북한산을 즐겨 그린다. 산은 산이되 산이 아닐 수 있다. 산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은 굳이 산이 아니어도 좋다는 의미이다. 직선의 난무, 거기에 리듬이 있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묘미이다. 왜 그런가. 한국의 산하는 비바람의 풍화작용으로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산의 능선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북한산은 리듬이 있다. 아니 한국의 능선은 리듬이 있다. 직선을 활용하여 산의 형태를 그렸지만 사실 그림 속에 리듬을 부여한 것이다. 리듬은 생명의 약동을 의미한다. 약동은 속도감을 불러온다. 그래서 직선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속도감은 바로 고구려의 속도이다. 겸재나 추사의 작품은 선을 잘 구사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선에 속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 끝에 리듬이 있다.

형상/비형상의 초월과 기운생동

화백의 작품은 언뜻 보면 추상회화와 같다. 하지만 작가는 형상성 있는 그림이라고 강조한다. 그것도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한마디로 그의 작품에 형상성은 있다, 하지만 사실적 표현은 아니다. 비형상과 형상이 하나의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독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심오한 정신세계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로 귀결되었다. 어려운 경지이다. 형상을 통과한 이후의 추상, 그리고 다음 단계 즉 추상을 통과한 형상, 이런 단계에서 현재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화백은 고구려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그러면서도 현대미술의 특성을 감안하여, 독자적 세계를 일구었듯이 형상과 비형상의 문제도 초월하고 있는 셈이다. 동북아시아의 고대 회화작품에서 추상적 요소를 발견하기란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전통 속에서 이미 추상적 요소도 함유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는 형상/비형상의 문제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작업한다.

화백 작품의 소재는 물론 자연과 인간이다. 현실경 속의 사실묘사를 사양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현장을 확인할 수 없을지 모른다. 추상적 형상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인체의 모습은 없다. 누드 작품이라 할지라도 인체의 특성은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막대기 형태가 사람일 수 있다. 형상은 버리고 본질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전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겸재의 <금강전도>가 금강산의 특징을 화가 나름대로 축약하여 독자적 방식으로 표현했듯이. 즉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실제의 금강산 모습과 다르다. 다만 겸재식 금강일 따름이다. 여기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해석 방식을 염두에 두게 한다. 어떻게 해석했는가.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석하여 독자적 어법으로 작품화했는가. 화백의 작품에서 강조할 사항은 바로 리얼리티의 중시라는 점이다. 화백은 형상/비형상의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리얼리티의 문제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화백은 리얼리티에 반응하지 않는 그림은 취미라고 단정한다. 리얼리티가 없는 예술은 오늘의 예술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왜 그럴까. 추상시대 이후 그림에서 이야기가 사라졌다. 그래서 화백은 예술에서 ‘이야기 회복’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형상성을 간과할 수 없다. 서사구도의 회복, 이는 현대미술이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회화에 있어 ‘이야기’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운생동이 없으면 죽은 그림이다. 기(氣)가 살아 있어야 좋은 그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기운을 그림에 부여할까. 우리 전통 속에서 서예 장르는 좋은 범본이 되고 있다. 화백은 서예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긴다. 서예가 주는 형상성과 조형성 그리고 결구미(結構美) 등은 매력 덩어리이다. 글씨 사이의 틈새, 그 공간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검은 색이 만든 하얀 공간이 중요하다. 한때 서체추상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동북아시아의 서예 전통은 미술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추사의 글씨에서 현대성을 읽어낼 수 있는 특성,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회화 속의 기운은 적당한 여백을 필요로 한다. 꽉 채운다고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백의 미라는 용어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여백을 꽉 채우면 장식이 된다. 여백을 메꾸면 기운이 사라져 죽은 그림이 된다. 기(氣)를 살리려면 적당한 여백이 필요하다. 이쯤 오면 화백의 작품이 주는 핵심적 요소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여타의 화가와 다를 정도로 비중을 많이 주는 여백, 그리고 직선의 난무, 형상/비형상의 단계를 초월한 그 어떤 것, 궁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부분의 하나인 기운, 여기서 화백의 작품은 곧 ‘오늘의 그림’이 되어 꿈틀거리는 것이다. 아니, 바람이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화백의 조형세계는 논리정연하다. 젊은 시절 비평가로서도 활동했지만, 화백의 철학은 독특하다. 문무겸비의 화가, 국내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닐까. 게다가 탁월한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1세기를 넘기면서 갈고 닦은 예술세계, 이제 거대한 귀결을 위해 ‘바람은 일어서고 있다.’ 물론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일러 회화작업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것은 없다는 논리와 상통한다. 그래서 화백은, ‘작품은 과정일 따름’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이에 전제되는 경구 하나가 있다. 바로 ‘미술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하기야 우주만물 안에 영구불변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변화할 따름이다. 예술 역시 진화한다기 보다 변할 뿐이다. 화백의 근작에서 ‘변화하고 있는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그곳에 조국예찬이 있다. 바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기운생동과 함께.

전시 정보

작가 김병기
장소 가나아트센터
기간 2016-03-25 ~ 2016-05-01
시간 10:00 ~ 19:00
휴관 - 없음
관람료 3,000원
성인 - 3,000원
어린이, 청소년 - 2,000원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720-1020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가나아트센터  I  02-720-1020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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