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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풍경 (Glacier Landscape)

신한갤러리 광화문   I   서울
변화만이 영원한 세상
김하나의 ‘빙하 풍경’ 전은 전시부제만 볼 때,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 떠있는 하얀 삼각형 모양의 빙하의 풍경이 연상된다. 그러나 ‘빙하 풍경’전의 작품들에는 그러한 전형적이고도 관념적인 풍경은 발견할 수 없다. 각 작품마다 다르게 구현된 색감과 붓질은 온도와 속도를 느끼게 하는 풍경은 더 자세히 관찰하고 탐구할수록 확실성은 더 떨어진다는 역설만 발견될 뿐이다. 평범한 일상 속의 인간은 하나 또는 몇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알 뿐이면서 확신하고 또 확언한다. 지배적 질서 자체가 그러한 상식, 이데올로기, 도그마로부터 구축되곤 한다. 그 임의성을 숨기기 위해 꽤나 그럴듯한 체계화가 진행되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언제라도 그 자의성을 폭로할 수 있는 실재의 흐름이 있다. 다층의 결 사이에 틈과 구멍들이 산재한 김하나의 변화무쌍한 작품들은 그러한 실재가 분출할 수 있는 얇은 판들을 만든다. 무한한 시간대를 일정 공간에 압축하고 있는 지질학적 퇴적층은 무너지고 녹아내리고 다시 결빙되거나 급격히 깍아 내려지는 등 극적인 과정을 내포한다.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는 김하나의 작품에는 빙하 안팎에서 일어날 법한 과정들이 작품의 전면에 놓인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에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회화를 포함시킨다. 그것들은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동렬의 관계에 놓인다. 그녀의 그림에는 풍경처럼 여러 요소가 공존한다. 풍경은 다양한 것들은 한데 모아 놓기에 적당하다. 그 풍경 속에서 ‘빙하’는 하나의 본질을 잃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변모를 거듭한다. 만약 누군가 빙하라는 추상관념을 모른 채, 여기저기에서 온 이미지들만을 본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듯한 다양한 국면이 연상될 것이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맹목과 혼돈, 분열과 해체, 총체적인 재난이다. 다양한 변화의 와중에도 무너지는 느낌은 크다. 빙하는 차갑지만 빙하를 녹이고 무너뜨리는 열기가 있고, 꽉 조여져 있던 것이 풀어지면서 발생되는 미열이 있다.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좌표가 없지는 않다. 작업실 벽면에는 수집한 빙하 풍경들이 붙어 있다.

저런 것도 빙하 풍경일까 하는 낯선 풍경들도 꽤 있다. 보통 작업실 벽면은 작가의 생각이 잉태되고 전개되고 때로는 파기되는 흥미로운 장이다. 아무 생각 없이 붙여 놓은 이미지나 끄적여 놓았던 글자들이 불현 듯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기도 하고, 관심 있어서 수집해 놓았지만 그냥 오가다 쳐다 볼 뿐인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한정된 용량을 가진 벽면은 단편들의 부침이 거듭되면서 무의식의 장처럼 끝없이 변화할 것이다. 시공간의 단층에서 포획된 그것들은 언젠가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여 작품이라는 몸을 입고 나와 온전히 발언할 것이다. 그러나 김하나의 어느 작품에서도 자료사진을 똑같이, 또는 부분적으로라도 재현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많은 풍경에서 보이는 희끄무레한 색들이 ‘빙하 풍경’이라는 부제와 연결될 법한 유일한 부분이다. 그 마저도 액체인지 고체인지 승화되고 있는 기체인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막막하다.

그것은 평화로도 두려움으로도 다가온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젊은 작가에겐 두려운 기색이 더 역력하다. 두려움은 공포와 달리 명확한 실체가 없다. 다양한 양상을 띄는 빙하는 그러한 유령같은 실체를 대변한다.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고 무엇으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있는 빙하 풍경은 현실성이라기보다는 잠재성의 색과 빛에 잠겨있다. 빙하 풍경에서 화이트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색채학에서 화이트는 다른 색의 혼합으로 만들어질 수 없기에 근본 색으로 간주되지만, 동시에 모든 빛의 통합체이기도 한 화이트는 하나가 아니다. 김하나의 작품에서도 화이트는 수많은 색과 만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누가 에스키모보다 더 많은 흰색을 알고 있을까를 물으며, 그들은 마흔 가지가 넘는 흰색을 가리키는 색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얀 세계에 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언어학자들이 밝혀낸 에스키모들의 세분화된 어휘는 흰색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상태의 눈을 가리키는 어휘이다.

빙하의 다양한 국면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풍경에서 관념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색으로서의 순수한 화이트는 발견되지 않는다. 작품 속 다양한 형상들과 결합된 화이트는 다양한 방향과 강도의 빛을 머금으며 추상적 원근감을 형성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정신과 물질은 거듭해서 소멸하고 거듭해서 태어난다. 또한 그것은 변화가 가능한 빈 공간 같은 역할을 한다. 에바 헬러는 흰색이 ‘텅 빈’과 동의어인 언어가 많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의하면 라틴어로 흰색은 ‘알붐album’이다. 앨범은 원래 하얗고 텅 빈 책, 즉 사람들이 스스로 기억과 사진으로 채워나가야 할 책이다. 그것은 옛날 지도에는 미지의 지역을 하얀 공백으로 표시하듯 미지의 색이기도 하다. 변화무쌍한 형상의 흐름만이 있는 김하나의 반(半)추상화는 고전적인 구분법에 의하면 ‘뜨거운 추상’--기하학적 형태를 바탕으로 하는 ‘차가운 추상’과 대비되는―이어야 맞지만, 화이트가 차지하는 잠재적 비중은 뜨겁고 열정적이기 보다는, 차갑고 냉정하며 심지어는 무감각하다.

중간 톤으로 칠해진 무인지경의 황량한 풍경에 자신을 투사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으로 그것은 나름의 자기보호, 가령 변온 동물처럼 체온을 다소간 낮춤으로서 차가운 세상을 그나마 훈훈하게 느끼는 방책 아닐까. 물론 관객은 ‘빙하’에 그렇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전시부제나 작업실 벽에 붙어있는 자료들은 출발점이 되어줄 뿐이다. 예술은 신의 창조와 달리 무로부터 시작되지는 않는다. 자연 또한 마찬가지다. 고대 원자론자들이 상상하고 현대과학이 다시 확인하듯이, 기존 입자들의 이합집산이 바로 이 세계이다. 영원한 회귀가 있을 뿐, 새로이 생겨나거나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 시점에서 종점을 향하는 하나의 불가역적 과정을 가정하는 특정 세계관만이 변화를 비극(또는 지나친 낙관주의로 가득한 진보, 또는 발전)으로 받아들인다. 흐르고 무너지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을 표현하는 작가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른 구체적 탐색을 통해 무엇인가로부터 출발은 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목표 없는 방랑처럼 스케치 없이 시작하는 작업 과정은 개념이 아니라, 감(感)을 따라간다.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순간 갈라지는 길에서의 선택을 위한 감이 중요한 것이다. 개념이나 논리의 전개는 마치 노동처럼 중간에 끊겨도 다시 이어질 수 있지만, 감은 그렇지 않다. 직업이 아닌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분위기나 감속에 계속 잠겨 있어야한다. 촘촘히 코드화되어 있는 현대적 환경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기껏해야 소비의 장에서 인공적으로 연출되는 사이비 분위기들이다. 분업화된 현대적 직업을 세계를 보라.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계획적 조정을 통한 공간의 분절화를 이뤄냈으며, 포드는 시간을 공간화 함으로서 어떻게 사회적 과정이 가속화될 수 있으며, 또 생산력이 증대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세계를 비판한다. 하비는 이러한 시공간 압축의 강도가 증가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 조건은 사회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인적 영역에서도 과도한 순간성과 분절화라는 시공간 압축을 설명해준다.

그러한 압축의 가속화에 기계가 아닌 인간은 대응하기 힘들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하비의 논의를 따라 마이크로 컴퓨터로 대표되는 시간과 공간의 유례없는 가속화를 설명한다.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 의하면, 경제가 기호에 기초하게 됨에 따라 이 기호들의 회전시간, 따라서 이 생산물들의 회전시간은 엄청나게 빠르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즉시적인 시간이 발생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속도에 대해 생각했던 폴 비릴리오는 ‘순간적인 의사소통 방식의 출현과 함께 도착이 출발을 대신하고 있다. 내일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영원한 현재가 생겨난다’고 말한 바 있다. [기호와 공간의 경제]는 ‘컴퓨터 세계에서 치리되고 있는 사건들은 우리가 결코 체험하지 못할 시간 영역에 존재한다. 새로운 컴퓨터 시는 시간의 최종적 추상화를 뜻하며, 인간 체험과 자연 리듬으로부터의 인간의 완전한 분리를 뜻한다’(리프킨)고 인용하면서, 이러한 즉시적 시간성과 대조되는 ‘빙하적 시간의식’을 내세운다.

이러한 지질학적 시간대는 보다 많이 생산해서 보다 많이 사용하는, 지속가능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지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의 대안 중의 하나이다. ‘컴퓨터적 시간성’에 의해 지배되는 ‘뜨거운 사회’(레비 스트로스)가 실제의 빙하도 녹이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녹아내려 같은 평면에 놓이는 풍경은 죽음과도 같은 수평선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루한(그러면서 가혹한) 균질화의 세계로 가는 지배적 흐름 속에서 예술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녹고 있는 과정을 더 가속화하는 것? 아니면 지배적인 하나의 흐름에 가려져 있는 다양한 시간의 결을 드러내는 것? 아마도 김하나의 작품은 그 중간 쯤 되는 듯 싶다. 인간이 결국 생로병사의 과정에 의해 (또 다른 생성을 위해)소멸하듯이 큰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대세라면 작가는 여기에 역행하는 다양한 흐름들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 관계와 과정을 부각시킴으로서 가능하다. 김하나의 작품에서 보다 다양한 리듬을 가지는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아닌 관계로 다가온다.

빙하는 응결된 하나의 장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시간을 통한 경과가 중시되는 작품들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무엇으로 감지된다. 그것들은 시간적 차원에 놓여있다. 견고하다고 여겨진 것은 미세한 차이들의 반복에 의해 헐거워진다. 리처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에서 어릴 적 사진 한 장으로부터 자기동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반성한다; ‘사람들은 내가 아직 같은 바로 그 사람인지를 공리화 하여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몸은 (어릴 적 내 사진 속) 아이들 중 그 어느 쪽과도 공통된 세포나 분자라고는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기 몸에 관한 한 시간의 경과를 넘어서 그러한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므로, 다시 말해서 몸은 계속 변화하고 갱신되어 그 어떤 미세한 부분도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러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물리적인 혹은 생물학적인 육체와는 다른 그 무엇임에는 틀림없다’고.

[형이상학]의 저자는 자신의 옛 사진을 통하여 먼 과거의 그 자신과 세포나 분자 같은 것을 공유하지 않는 전체적인 갱신을 그가 겪었음을 발견한다. 사람은 시간의 경과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와 갱신을 겪는다고 보는 것이다. A는 A일 뿐이라고 확언하는 동일성의 사유는 와해 중인 빙하처럼 근저로부터 무너진다. 육체에서 일어난 사건은 영혼과 정신에서도 일어난다. 김하나의 변화무쌍한 풍경은 시간성의 축에 놓여있는 모든 상황을 포괄한다. 영원함이나 명확한 것을 요구하는 형이상학이나 공리적 사유는 이러한 시간성을 억압한다. 현대적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정보혁명의 시간 감각은 어떠한가. 가령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을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반복함으로서 연산하는 기계에 내포된 시간성은 육체 및 정신의 과정에 내포된 시간성과 차이가 있다. 김하나의 회화 속에서 발견되는 불확실성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육신과 마음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다. 빙하 풍경의 다양한 국면 역시 복잡한 시간성을 말한다. 김하나의 빙하 풍경 역시 사계절을 담고 있으며, 물이나 땅과도 접해있다. 빙하는 저 멀리에 있는 우리와 무관한 이국적 풍경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물과 땅으로 비롯되었으며, 시간 속을 사는 모든 존재에 작용하고 있는 미시적이고도 거시적인 힘의 결집체로 다가온다.

상황 속에서 만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이를 전체적으로 수렴하는 회화 또한 그러하다. 화면에 풀려나는 물감이 얼음이나 물 같은 양상을 띄고 있다는 유사함이 하나의 행위에 수많은 상징을 중첩시킬 수 있게 했다. 층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들 때문에 ‘빙하 풍경’이라는 부제에서 언뜻 떠올려질 고요함은 찾기 힘들다. 연속적, 불연속적 단면들, 그 경계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연, 인간, 회화라는 삼중의 층이 한데 어우러져 또 다른 실재를 형성한다.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김하나의 작업이력에서 자연은 나중에 온 것이다. 영국 유학 중의 작업에서는 결, 틈, 구멍 같은 요소가 출몰하다가, 졸업 전시 작품에서야 빙하가 처음 등장했다. 빙하는 작가가 관심을 가졌던 요소의 결집체로 다가온 것이다. 지금 작가는 온 몸으로 빙하 풍경을 통과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것이 사막이 될지, 바다가 될지, 밀림이 될지, 또는 머나먼 외계의 행성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 불모의 풍경 속에서 많은 요소들을 건져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술 행위가 속해 있는 이 바깥 풍경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이선영(미술평론가)


작가소개
김하나 (b.1986)
2011 런던예술대학교 첼시 순수미술(학사) 졸업
개인전 2016 빙하풍경, 신한갤러리 광화문
그룹전 2015 오늘의 살롱 2015, 커먼센터, 서울

작업노트
나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무너지며 동시에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형상화 한다. 스스로를 존재시켜나간다는 것은, 붕괴와 변화의 연속성 속으로 편입되는 것 이다. 마치 빙하가 끝이 없는 변화와 저항 속에서 녹아버리거나 계속 삶을 유지하듯, 변화와 흐름이라는 요소는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빙하와 인간을 한 수평선에 대치시킨다.
빙하는 고정적인 단단한 형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지가 끊임없이 뒤섞이고 흐르는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빙하는 붕괴하고 변화한다는 그 존재방식 자체로 인간의 메타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작업하는 빙하는 빙하의 형태에 대한 탐미적인 방식이 아닌 빙하의 존재방식에 대한 존재론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특정인에게서 우연한 마주침을 느끼듯, 실제로 나의 관심을 끄는 빙하의 사진과 영상 이미지로부터 작업은 시작된다. 그 후 계속적으로 다른 빙하의 이미지들을 접하며, 나는 캔버스 위에 예측 불가능한 비연속적 변화들을 도입시킨다. 결과적으로 시발점이 된 일련의 빙하들은 과정 속에서 붕괴되는 동시에 건설되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지닌 빙하가 된다.
이러한 작업이 이어질수록 나의 관심은 회화 자체로 옮겨갔다. 회화란 매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감의 물성을 잘 이용한다면, 작가 스스로가 인위적인 즉 의도적인 변화를 도입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회화의 자연스러움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빙하라는 매체는 조금씩 사라지고, 다시 우연적인 붕괴와 변화라는 본질로 회귀한다.
결국 작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본래의 의도란 없던 것이 되며, 작업의 결과물이 사실상 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타자, 그리고 주체로서의 역할을 실행한다. 시각적 단조로움 대신에 다채로운 빛들, 실제적인 단단함 대신에 결의 무한한 변형들. 결론적으로 단단한 외피로부터 발가벗겨진 한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전시 정보

작가 김하나
장소 신한갤러리 광화문
기간 2016-05-02 ~ 2016-06-08
시간 10:00 ~ 18:00
휴관 - 일요일
관람료 무료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722-8493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신한갤러리 광화문  I  02-722-8493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35-5 (태평로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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