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K 공항보다는 링컨터널을 빠져나와 포트 어소리티로 들어가는 나선형 고가를 탔을 때,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타임스퀘어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뉴욕에 왔음을 실감한다. 우리가 관문보다는 어떤 '풍경'을 랜드마크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순히는 ‘땅’과 ‘표시’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말로, 사전적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특정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삼는 표식이나 이정표로서 그 지역을 대표하거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형이나 시설물”을 가리키는 단어인 랜드마크(landmark)는 우선 관광 산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이름이 없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듯이, 랜드마크 없는 마을 혹은 도시는 존재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관광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에서 랜드마크의 보유 수준은 그 나라와 지역의 정치경제적 자산이기도 했다. 또한 소수의 탐험가가 다수의 여행가로 방문 목적은 좀 더 안전해지고 방문 경험은 뚜렷한 추억과 자랑거리가 되면서 랜드마크는 ‘장소 인지’ 측면에서 확실한 우선권(priority)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세계화의 조짐을 보며 “지구촌(global village)”라는 말을 내놓으면서 랜드마크의 표상을 어떤 성격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신자유주의적 시선으로 봤을 때는 더욱 큰 우선권을 가져간다는 관점이 가능하지만, 그 와중에 어쨌든 보편화하고 있는 해외 여행 경험의 확산과 대중 감각의 축적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평등해지고 있는 양상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를 읽는 데 있어 랜드마크는 그 자체로 표상하는 바가 있었다.
랜드마크는 태생적으로 시각적 속성이 강한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위의 흐름을 미술 이론가인 데이비드 서머스(David Summers)의 말을 빌려 부연하자면, “우리는 미술에 대해 ‘지각적’, ‘환상적’, ‘개념적’, ‘관념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짚고 넘어가자면 이는 그 자체로 다중적이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의 중첩이다. 이 때, 재현과 표상주의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현재(present)’라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설명은 좋은 참고가 된다. 좀 어렵게 말해, 재현을 행하거나 재현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현전은 물론이고, 어떤 것의 현전을 전제한다. 주체의 감각은 스스로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어느 지역의 대표성을 찾아 그리는 김주희의 작업은 오히려 이 ‘표상’이 중립적인 차원에 다다랐음을 의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기능하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적 차원의 추억에 머무르지도, 어떤 대단한 자산이 되지도 못한다. 다만 희미해지는 기억을 재확인하거나 박제하듯 ‘현재’에 계속 ‘재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기(presentment)’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진이나 그래픽이 아닌, 전통적 회화적 속성을 극대화하는 유화로 그려진 것과, 자신의 색감 또는 중첩된 묘사를 통해 표상적 대상(representative object)임을 강조해온 것을 고려해볼 때, 작가가 추구하는 시간과 감상 주체의 보편성(universality)은 최근 우리에게 부족한 중립성(neutrality)을 하나의 미덕으로 환기한다.
여기서 중립이란 무색 무취의 무책임함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마치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로움, 여행을 다녀온 다음엔 그 경험을 앞다투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비경합성을 의미한다. 심지어 랜드마크는 이제 그 곳을 직접적으로 가지 않아도 다녀온 사람과 유사한 수준의 감각적 점유가 인정되는 ‘미디어적 공유지’가 되었다. 유튜브만 틀어도 랜드마크를 찍은 4k 영상을 경쾌한 재즈 음악으로 만나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미디어적 첨단화가 일찍이 소설 <유토피아(Utopia)>에서 예견된 것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마크 오제(Marc Augé)와 같은 급진적 인류학자는 무심코 지나치는 ‘비장소(non-places)’에 세계 유명 랜드마크들을 이름 모를 경로들과 함께 묶어 버리기도 했을 정도다. 이렇게 볼 때, 비장소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시된 ‘인류학적 장소(anthropological places)’라 할 수 있는 랜드마크의 ‘그림’들은 새로운 가치와 친근함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대중적 구호가 더욱 설득력을 얻어가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더 이상 관광은 그 자체로 산업화하지 않고, 미디어적으로 재소비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찾기에, 지구촌 사람들에게는 ‘중립적 표상’이 감각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랜드마크가 그 지역을 감각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그 감각에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희의 작업들은 그 장소에 대해 직관적이면서도 중첩적인 터치를 통해 현실에 언제나 존재하나 익명적인 환상의 풍경으로서 감정의 개입을 폭 넓게 열어둔다. 즉,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경쾌하고, 회상을 하는 듯하면서도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그 땅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주희는 표현의 중첩을 통해 그림이 담아낸 시간의 중첩이 중립적 표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의식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김주희가 그려온 풍경은 기존의 장소가 가진 정보의 기능이나 기억의 미화를 넘어 어느덧 '미술'이라는 영역이 갖는 자기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