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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석 개인전

갤러리담   I   서울
밤과 도시의 상형문자 최봉림 / 사진평론가 인류는 탄생한지 백만 년이 되서야 시간과 더불어 덧없이 사라지는 몸짓과 음성 언어의 한계를 그림과 조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동굴의 벽과 바위에 이런 저런 형상을 그리고 새겨, 원시인은 그의 세계관을 거칠게 드러냈다. 이렇게 자연을 모방하는 도상 icon을 사용하여 세계관을 표상한 지 거의 17,000년이 지난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글쓰기를 통해 보다 간편하고 빠르게 우주와 자연, 그리고 자신의 공동체와 의사소통을 꾀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구성물과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상을 약식으로 재현하는 문자로서 사물과 사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인류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4,000-3,000년 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역에서 발흥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들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구상적 도상 figurative icon과 더불어, 쐐기꼴 모양의 설형문자 cuneiform를 함께 사용했다. 여전히 그들은 이전 문명들이 사용했던 약식 데생, 그림문자 pictogram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설형문자를 병용하면서, 사물, 사건, 생각을 기록하고 표현했다. 이 문명인들은 단순한 설형 문자가 지시하는 음과 의미의 조합을 통해서는 복잡다단한 자연과 사회 현상을 온전히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도상의 성격을 지닌 문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상형문자 hieroglyph라고 통칭할 수 있는 기호체계로서 기억을 보존하고, 사실을 전달하고자 했다. 뜬금없이 상형문자의 기원을 얘기한 것은 바로 정동석의 최근작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3년여에 거쳐 도시의 밤을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설형문자의 형상으로 사진 찍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구를 빌면, “(...)거리거리들달록불/긋반짝번쩍눈에들어와/어깨에앉아가슴에닿아/장광설(...)”인 밤의 도시를 약식 데생, 그림문자 혹은 설형문자의 형상으로 환원시키는 사진작업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록불긋 반짝번쩍 (...)장광설’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작가 역시 최근 작업의 소재인 장식조명들을 의사소통을 위해 도시의 밤이 떠들어대는 일종의 기호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도시의 밤을 밝히는 조명장식들은 순수한 미학적 산물이 아니라, 건물의 위치를 알리고, 도시의 거리에서 부유하는 시선들을 유혹하는 일종의 기호이다. 다시 말해 밤을 수놓는 장식조명들은 ‘알록울긋와/글시끌눈마추쳐’ 자신을 매혹적으로 인지케 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끌려는 기호 장치이다. 게다가 밤의 네온 조명들은 그것들이 치장하는 건물의 용도를 형태와 색채라는 시각 장치로써 거리의 행인에게 알리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약식 도상, 그림문자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서 분명 상형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러브호텔은 사랑과 일탈 욕망을 자극하는 설형문자, 그림문자를 사용하며, 음식점은 맛과 포만을 상징하는 기호를 활용한다. 술집은 취기와 쾌락을 상징하거나, 현실의 안식처라는 상형문자를 애용하며, 교회는 당연히 십자가라는 상징기호를 조명장식으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밤 도시의 조명장식은 건물의 용도를 행인들에게 홍보하고, 그것의 위치를 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하려는 상형문자인 셈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표음문자 phonogram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이 도시의 상형문자들을 상인이나 건물주의 바램처럼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구어의 음을 경제적으로, 체계적으로 전사하는 한글문자, 영어 알파벳을 통해 건물의 용도, 사업의 종류를 파악한다. 즉 도시의 밤을 장식하는 직선, 사선, 삼각형, 계단형 등의 도형문자들은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의사소통의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정보전달이 수월하고 기분 좋게 이루어지게 하는 장식문자의 역할을 한다. 혹은 지시대상의 형상 figuration이 제거된 표음문자의 의미작용을 증폭시키고 기억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행한다. 물론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간판 역시 기억을 용이하게 하는 기술 mnemonics과 문자의 의미작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색채, 타이포그래피, 도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건물의 조명장식과 그 기능이 크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간판은 일반 텍스트의 언어처럼 ‘지성’의 이해에 호소하는 언어가 아니라 ‘시각’을 공략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장식조명과 간판 사이에 존재하는 기능의 차이를 묵과할 수는 없겠다. 간판은 그 자체만으로 건물과 상행위의 용도를 분명히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업을 홍보한다. 반면 장식조명은 그 자체로 업종과 건물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다. 게다가 불을 밝혀도 잘 보이지 않는 낮에는 홍보와 광고의 보조 역할도 행할 수 없다. 오직 밤에만 건물을 장식하고, 상행위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런데 3년간 도시의 밤거리를 산보한 사진작가는 엄격한 프레이밍 framing이라 불리는 사진적 절단 행위를 통해 지시대상을 ‘청각적 이미지 acoustic image'로 전달하는 표음문자를 철저하게 제거했다. 극단적 클로즈업을 행하여 장식 조명이 부착된 건물의 전체적 형상을 가늠할 수 없게끔 했다. 오직 건물의 가장자리를 지나고, 외벽에 부착된 설형문자와 같은 네온 장식에, 혹은 건물을 장식하는 도식적 형상의 일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작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장식조명의 배경을 이루는 건물 벽의 질감, 주변 공간도 완벽하게 밤의 어둠 속에 묻어버렸다. 결국 정동석의 밤 사진에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설형문자 형태의 네온장식만이 형형색색의 불을 밝히게 되었다. 그의 극단적 프레이밍, 배경을 암흑 속에 잠기게 하는 노출 테크닉은 건물의 외벽을 장식하고, 건물의 테두리를 두르는 조명장식을 한글과 알파벳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도시인들로서는 해독하기 어려운 그림문자, 표의문자 ideogram로 만들었다. 정동석의 밤의 상형문자들이 창문, 층계, 지붕, 건물의 구조를 간략하게 표상하는 약식 도상의 형태를 띨 때조차 촬영건물의 용도와 정체성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포착한 조명장식들은 그 전후문맥이 철저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하면서 해독해야할 고립된 상형문자로 변하여, 작가의 야경 사진은 일종의 그림 맞추기 수수께끼 rebus가 되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답을 아는 사람은 작가뿐이다. 그것은 그가 상황의 전모를 파악하면서 사진촬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밤 도시의 장식조명을 채집하면서, 조명장식의 형태와 색깔의 ‘일반 문법’을 터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건물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네온장식의 형태와 색의 선택, 그리고 그 조합이 이루어지는 규칙을 발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수메르의 문자, 이집트의 고대문자를 해독하는 언어학자가 개별문자의 의미와 그 개별문자가 다른 문자들과 결합하면서 여러 다양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기제 mechanism를 알아내듯이, 작가는 네온장식의 기본 형태, 색상들이 단독으로 혹은 상호 결합하면서 건물의 용도, 상행위의 종류를 드러내는 일종의 ‘문법’을 발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작가는 어떤 규약, 문법을 확정하지 못한 채, 임기응변식으로, 즉흥적으로 장식조명을 설치하는 우리 도시 조명의 ‘원시성’만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즉 작가는 밤 도시를 채우는 네온의 갖가지 형상들을 어떠한 규칙과 체계 없이, 따라서 어떤 의미작용을 구성하지 못한 채 무질서하게 호객행위만을 하는 ‘야만의’ 상형문자로 규정했을 수도 있다. 어떠한 미학적 의식도 없이, 형태와 색채의 어떤 기호학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뻔뻔스럽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적만을 광고하는 자본주의의 천민성만을 보여주는 상형문자들로 파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밤 도시를 수놓는 장식조명들이 상형문자의 체계를 갖췄던, 혹은 상형문자 탄생 이전의 야만적 상태이던, 작가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언어학자의 태도로 그것들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업종의 귀천(貴賤), 건물의 미추(美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치밀한 프레이밍을 통해 도시의 밤을 밝히는 장식조명의 자음과 모음, 음절을 고립적으로 기록했다. 마치 상형문자의 체계를 밝히려는 언어학자가 건물 벽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탁본 뜨듯이 말이다. 검은 먹을 배경으로 하얗게 새겨진 탁본의 상형문자처럼, 정동석이 포착한 밤 도시의 상형문자들은 칠흑의 어둠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그 간결한 선으로, 군더더기 없는 명확한 형상으로, 그 강렬한 인공색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대의 설형문자, 그림문자처럼 시선을 유혹하는 그 밤의 문자들은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음식점, 천박한 모텔, 선정적인 술집의 싸구려 조명일 뿐이다. 태양 빛과 더불어 초라하게 사그라질 호객용 장식들일 뿐이다. 그러나 정동석의 사진 속에서는, 전혀 천박하지 않고, 조금도 값싸지 않고, 역겨운 교태도 없이, 작가의 글 제목처럼 ‘밤의 꿈’처럼 빛난다. 미니멀 아트의 작품처럼 냉정하고 엄격하게, 그러나 화려하게 빛난다. 이것은 분명 하찮고, 치졸한 밤의 ‘장광설’조차 엄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지성과, 뻔뻔스럽고 역겨운 도시의 ‘장광설’조차 생명의 활기로, 삶의 열정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포용력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작가가 따스한 이해와 차가운 분석의 시선으로 탁본을 뜬 밤 도시의 상형문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 장식조명의 정체를 그림 수수께끼처럼 맞추어 보기로 하자. 정동석 - 네온으로 그려진 밤 풍경 박영택 /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정동석은 짙은 수면에 잠기듯 어둠 속에 서있는 건물의 외관을 찍었다. 사실 그것이 건물인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다. 온통 검은 색으로 적셔진 화면에 그저 가는 선이 칼라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문득 밤에 건물의 외관을 장식하고 드러내는 수단으로 설치된 네온에 주목했다. 그 네온의 구성과 조명, 색상은 밤의 풍경을 균질하고 보편적으로 마감시킨다. 대한민국의 모든 밤은 바로 이런 풍경으로 한정되어있다. 서울이나 수도권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그렇다. 낮과 밤은 다르지 않지만 조명에 의해 밤은 낮과는 별도의 세계인양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명시적이며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는 낮과는 다른 차원에서 밤은 존재한다. 어둠은 가시적이며 이름으로 인해 분리와 배제가 이루어지는 밝음의 세계를 덮는다. 그런 면에서 밤은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가 하면 상처를 진정시키고 모두를 침묵으로 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시간을 유장하게 드리운다. 그래서 밤은 성찰적인가 하면 연민과 슬픔, 우울이 평화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밤은 빛이 지워지고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온통 검은 색으로 물들어있다. 검정은 단순한 색 혹은 무색이다. 그러니까 검정이란 밝고 어두운 구별을 결정하는 우리 눈의 망막 간상체가 사물에 대한 인지과정에 관하여 나타나는 색상일 뿐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색이며 우주의 섭리인 빛과 어두움의 이치를 드러내는 색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장 단순하고 익숙한 섭리, 즉 낮과 밤, 빛과 그림자를 당연하게 여긴다. 따라서 흰색, 검은 색은 색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의 얼굴, 낯빛이다. 그런가하면 검은 색은 삶을 기피하는 것, 즉 모든 긍정적인 발전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을 암시하는 색상이기도 하다. 검은 색은 생명이 다하는 최후의 상황이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검은 색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소멸하고자 하는 모든 감정을 비유하는 색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정동석이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한지는 온통 짙은 검정 색으로 물들어있다. 마치 검은 먹물에 잠겼다 건져진 듯하다. 한지의 내부로 검은 색상이 스며들어 일체가 된 듯하다. 그러나 이 사진은 흑백사진이 아니다. 음영이 차이가 나거나 흐리고 진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어두운 배경에 다만 네온의 선만이 지나간다. 네온을 빼면 절대적인 암흑,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납작하게 드리워져있을 뿐이다. 모종의 관념과 감상적인 분위기로 적셔진 흑백사진과는 달리 이 사진은 감정을 배제하고 관념성을 지운 자리에 다만 도시의 밤 풍경의 한 단면을 면도날처럼 보여준다. 캄캄한 밤, 그 어딘가에 특정 색채가 그려진 듯 직선으로 사선이나 유선형으로 자리한다. 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건물의 외관과 표면에 걸쳐놓은 네온이 발광하는 인공의 불빛이다. 인공의 불빛이 많을수록, 강렬할수록 저 먼 별빛은 자리를 감춘다. 네온의 색상은 차갑게 빛나고 그 위로 무심하게 달이 떠있기도 하다. 결국 밤이란 세계, 공간 역시 빛을 동반한 가시적 존재가 지속해서 낮을 연장하고 시간을 확장해서 우리들의 망막을 장악하는데 그것은 거대자본이나 소비와 욕망을 자극하는 건물의 외관에서 밤새 ‘발광’(發光)한다. 낮과 밤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나름대로 낭만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은 근대에 와서 달라졌다. 전기와 조명, 상업과 자본증식에 따라 밤은 낮시간의 지속으로 확장되고 생산과 소비의 동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밤도 욕망과 유흥과 소비의 현기증 나는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오늘날 밤은 이전과는 달리 낮과 하등의 구분이 없다. 빛과 낮을 연장시켜 하루를 온통 환한 불빛과 욕망 아래 전시하는 것이 도시다. 그래서 도시는 밤에 더욱 들뜬 욕망과 환상을 조명을 통해 부여받는다. 밤에 드러나는 건물들은 조명과 네온 간판으로 더욱 세고 강한 자극을 보여준다. 연출한다. 어쩌면 밤의 풍경이 도시, 자본주의의 진정한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모든 것을 지웠다. 사진은, 눈은 빛으로 가득한 세상의 이미지를 자기 눈으로 보고 드러낸다면 그는 밤을 의도적으로 택해 모든 것을 은폐시켰다. 따라서 찍힌 것은 대상이고 개별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차별과 구분, 분리와 배제 이전에 동일한 존재들로 평등하게 엉켜있다. 이것은 밤이 주는 힘이다. 낮이 잘나고 힘있고 권력적인 존재들의 과시적 장이라면 밤은 그런 차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인위적 편재인지를 말없이 덮어버린다. 어떠한 문구나 이미지, 사람의 흔적, 그리고 밤의 풍경과 그 주변을 연상할 어떠한 정보도 없다. 모든 것은 부재하다. 있다면 조그마한 단서처럼 조심스레 놓인 선, 불빛 같은 네온의 선들만이 달랑 위치해있다. 간혹 조명이 끊어져 불빛이 감추어진 것도 있고 생략되어 있는 것도 있다. 가늘고 얇은 단속적인 선들이 짙은 암흑을, 검정의 밤을 가로지르거나 흥미로운 선의 자취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흡사 그림을 닮았다. 얼핏보면 추상적인 그림을 연상시킨다. 단서처럼 주어진 선은 상상력을 동원해 밤의 그 무진장한 만화경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말이 무성하고 과잉의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낮의 세상에서 그가 택한 말하기는, 보여주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침묵과 어눌함 속에서 함축과 본질만을 간파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아주 미미하고 정보량도 적고 최소한의 것만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이런 보여주기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주어진 단서를 곰곰이 읽어보도록 권유하는 편이다. 사실 밤을 찍은 대부분이 사진들은 상상과 환상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거나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관심이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의 풍경사진들이 한결같이 의미부여와 관념을 드리우면서 감상을 상투적으로 증폭시켜내는데 반해 정동석의 풍경은 늘상 그런 기대치를 저버리고 일종의 ‘반풍경’적 자세를 고수해왔다. 이번 밤 풍경 역시 그만의 시선과 자세로 동시대의 밤 풍경을 독특하게 보여준다. 모든 도시의 밤은 거의 동일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밤은 그런 면에서 평등하면서도 획일적인 풍경을 또 한 번 반복하고 연장한다. 오로지 관능과 유혹, 현혹의 불빛만이 어둠을 지배한다. 어둠 속에서 휘황하게 반짝이는 불빛과 네온간판의 문자들은 도시인을 더욱 고독한 방황, 걷잡을 수 없는 비릿한 욕망의 소요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곳의 밤은 낮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으로 돌변하는 기이한 체험을 준다. 그래서 그 불빛, 조명과 네온이 만든 선을 보노라면 슬프다. 그것만큼 비정한 도시의 추상성을 보여주는 상징도 없을 것이다. 교회, 모텔, 유흥가, 커다란 빌딩, 건물의 외관들은 간략하고 단순하게 그 윤곽, 형태감을 네온 선으로 부감시킨다. 선이 죽죽 내려가면서 꺾이고 다시 내려가면서 어떤 형상을 연상시키는 이 화면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사진이다. 도시에서의 이미지는 전파, 조명, 디지털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만든 풍경으로 자존한다. 이전의 밤 풍경이 달빛과 먼 별빛에 의지해 가까스로 드러났다면 오늘날 밤은 조명, 인공의 불빛으로 장식되어 넘친다. 그래서 밤에 그 불빛은 모든 시선의 종착점과 휴식점이자 다시 밤에만 살아나는 좀비나 드라큘라의 욕망을 도시인들에게 강제한다. 도시의 밤은 조명을 찾아다니는 드라큘라, 좀비들의 공간이다. 네온의 조명, 밝기는 번지면서 흐려진다. 건물의 가장 바깥자리, 외곽에 붙어 서식하는 이 네온의 끈들은 건물의 높이와 규모를 알리고 증거하며 그 모든 시간 위에서 영생하고자 한다. 작가는 밤에 그 네온의 윤곽선들만을 화면에 가득 담았다. 오로지 그 불빛 띠, 조명 선만이 어둠 위에 떠있고 가로질러있다. 흰색, 파란 색, 붉은 색, 녹색의 네온 형광등은 그 둥그렇고 구부러진 몸통을 빛으로 채워 걸린다. 마치 댄 플레빈(Dan Flabin)의 작업처럼 그 조명은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고 번져나가면서 뜨끈한 온기로 채운다. 동시에 그것은 비정하고 서늘하다. 모서리에서 보면 그 네온은 화살표를 연상시킨다.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를 염원하는 욕망의 단편들이기도 하다. 간혹 어떤 네온은 마치 모스크바의 성당이나 크렘린 건물을 닮았고 더러 이국적이고 환타지를 자극한다. 밤의 네온은 모든 이들을 낮과는 다른 미지의 세계, 환상과 낭만, 동경과 유혹으로 채워진 어떤 세계를 허영처럼 연출한다. 낮의 그 어수선하고 부산하며 정신 산란한 이미지를 감추고 선명하게 분할된 공간을 하나로 통합해버리고 낯선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 변신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조명에 의해서이다. 어떤 작품은 수직의 네온을 경계로 해서 건물의 외관에 비친 달이 두 개로 번져있다. 거기 달이 구원처럼 떠있다. 그러나 그 달은 도시인들에게 진정, 어떠한 구원을 말해줄까?

전시 정보

작가 정동석
장소 갤러리담
기간 2016-08-17 ~ 2016-08-31
시간 12:00 ~ 18:00
휴관 - 일요일
관람료 무료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738-2745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갤러리담  I  02-738-2745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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