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업 안에서의 ‘도자기’는 의식의 흐름을 담을 수 있는 주된 언어이자, 정신을 물질화하여 보전(保全)시킬 수 있는 매질(媒質)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의 작업은 발견된 ‘유물’의 역할이 그러하듯이, 당대의 삶의 방식들을 기록하고 보존한다. (유의정 2014)
서론: 삶의 방식을 섞다. 유의정은 도자기를 사용해서 당대 삶의 방식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당대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당대라고 해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의 범위를 한정짓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대의 문화를 임의적으로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한정시키고 그 안에서 문화를 몇 가지 특징에 따라 구분하고 정의하는 일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유의정이 당대의 문화를 논의하는 방식은 그에 대하여 정의하는 것보다는 당대의 문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재고해 보도록 유도하는 편에 가깝다. 웅장한 러시아 파베르제 에그(Fabergé egg)를 연상시키는 형태의 정중앙 위에 중국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든가 국보에 해당하는 고려 상감이 들어간 대접의 중앙에 스타벅스의 문양을 넣는다든가 하는 식의 수법은 문화적 혼용성의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도자기의 형태와 모티브가 뒤섞여 있는 도자기들은 ‘혼용성’ 그 자체를 재현해내고 있다기 보다는 문화적인 순수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이 때문에 필자는 유의정의 최근 행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점차로 작가는 도자기 자체를 만드는 방식에서부터 도자와 연관된 각종 행위예술을 진행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한국적이란 양식은 과연 어떻게 규정되고 연구되며 퍼져나가게 되는가? 혹은 우리가 특정한 사물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사물의 이면, 혹은 바라보는 대상을 온전하게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가?
도자사로부터 배우다. 도자 전공자였던 유의정 작가는 다양한 테크닉과 문양을 결합해 왔다.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도자기에는 우리가 흔히 접해온 각종 양식, 문양들과 심지어 대중소비문화의 로고들이 혼재되어 있다. <청자상감운학 스타벅스 문대접>(2011) 내부에는 스타벅스의 동그란 문양이 들어가 있고 나이키의 로고를 청자로 구워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의정의 도자기들은 식민지 사관의 결과로 형성된 한국 도자기의 특성에 대한 통상적인 편견과도 한참 거리를 두고 있다. 거대한 중국 한자의 복자와 금테두리를 한 러시아의 파베르제를 닮은 <시대착오>(2012)는 문화적 혼용성의 한 본보기가 될 뿐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주도적인 시대 양식이 가능한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시대적인 양식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할 것이라는 미술사에서의 분류도 무색하게 만든다.
문화적 정통성의 문제는 어려서부터 경복궁 근처에 거주하였던 작가에게 중요한 이슈이어 왔다. 모순되게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것에 대한 감흥은 유의정 작가에게 중요하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는 비로소 시대 양식, 문화적 순수성, 전통, 진짜 가짜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문화적 혼용성에 대한 관심이 동전의 양면처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병행되어져야 왔음을 보여준다.
나아가서 작가가 말하는 도자기의 당대 양식에 대한 개념은 대학 진학 후 전공 도자 수업을 통하여 체득된 것이다. 작가는 대학에서 인간의 각종 욕구와 관심을 담아온 오랜 도자기의 역사가 몇몇 주요 보물들로 축약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떠한 경로로 특정한 시대의 도자기들이 선택되고 전통, 정통성, 문화적 순수성, 시대 양식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커졌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착오>는 어떠한 시대를 압도하는 특정한 양식이 있을 것이라는 도자사에서의 중요한 전제를 여지없이 뒤엎는다.
더불어 유의정의 <동시대 문화연구 형태>(2014)에서 다양한 시대적, 공간적, 문화적 배경에서 유래한 문양들이 매우 작위적이고 과장되게 섞여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도자기는 보는 이에게 일종의 불편함이나 조롱을 자아낸다. 작가는 그의 작업이 한때 팝아트와 비교된 적이 있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과장되고 심지어 유머러스하게 보이는 그의 작업이 지닌 키치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부하기는 하지만 키치(Kitsch)는 문화적인 순수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져 오고는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의정의 관심은 도자기 자체를 생산하는 일로부터 점차로 혼용성이나 순수성에 대한 개념을 생성해가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옮겨지고 있다. 최근 창동에서 한 전시회에서 그는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제대로 된 문화유산인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2014년 창동 레지던시에서 <창동에서의 프로젝트 팍텀(Project Factum in Chang-Dong)>이라는 퍼포먼스를 시연하였다. 작가는 고궁에서 문화재 안내를 담당해온 여성을 직접 섭외하고 자신이 만든 가짜 매뉴얼을 관객들 앞에서 재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제 문화재에 대한 설명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하게’ 경배의 대상이 됨직한 문화재를 만들고 박물관에서 보물을 관람할 때와 유사하게 내부를 꾸몄다. 물론 이 설정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술관의 관객이 지닌 감상태도나 목적이 일반 고궁을 방문한 관객의 그것들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유의정의 행보는 도자기가 지닌 기이한 형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문화적 혼용성을 둘러싼 개념적인 측면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을 이루고 있다.
유의정은 <네 가지 풍경>(2015)에서 하나의 도자기가 다른 시점에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보이는 작업을 제작하였다. 빛과 유리를 사용해서 만든 상자내부에 비춘 모습을 통하여 관객은 다른 시점에서 다른 도자기가 보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 작업에서 도자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작업의 주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느 한 시점에서 보이는 특정한 도자기의 모습이 반대편에서 보게 되면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진실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를 보고자 한다면 다른 것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이를 문화적 순수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자면 우리가 믿고 있는 문화적 순수성이란 결국 복합적인 현상을 보고 싶은 한 쪽 방향에서만 선택적으로 보아온 결과일 수 있다.
새롭게 당면한 과제 유의정의 작업은 최근 전통 공예를 과학적인 기재나 혼용성과 같이 소위 동시대적인 예술적 테마를 사용하여 제작해온 예술작업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도자기는 1990년대 이후 국제 아트 페어나 미술관의 전시 등에서 문화적인 특수성이나 차별화를 강조하기 위하여 쉽게 차용되어져 온 인기 있는 예술 장르이자 기법이어 왔다. 반면에 유의정은 전통 도예를 사용하지만 문화적 혼용성 그 자체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는 자칫 국수주의적이고 편협한 방식으로 전통문화를 차용해온 방식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정의 작업이 아직도 순수성과 혼용성의 이분법에 고착되어 있다는 비난을 가할 수 있다. 문양이나 로고 등이 혼재되어 있는 ‘키치’적인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관객들은 과연 정통성이 무엇인지, 혼용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이들의 반응 또한 가짜 문화유산과 진짜 문화유산에 대한 이분법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자상감운학 스타벅스 문대접>에서 혼용된 도자기가 자연스럽게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풍자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렸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게다가 동의하건 아니건 간에 관객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고상한 문화유산에 대비되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시대착오>와 같은 작업이다. ‘키치’적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문화적으로 순수하지 않는 도자기의 측면이 부각되어져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키치적이고 혼용적인 도자기들에 반하여 문화재들의 우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유의정의 작업이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문화적 혼용성과 순수성의 문제 중에서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지 않으면서도 작가가 문화적 순수성과 위대함, 주도적인 시대적 양식 등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질문은 다양한 매체와 장르로 자신의 도자기 프로젝트를 확장시켜가고 있는 유의정이 해결해야 할 새로운 과제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