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표면 위의 세계다. 이 세계는 때론 날카로운 선으로 때론 뭉툭한 형상으로 탈바꿈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그 이야기가 뭐라 똑 부러지게 정리할 수 없는 장면이든지, 일렁이는 빛 속에서 건진 사물들의 왜상이든지, 무의식적 욕망이 투사된 기이한 꿈이든지. 어찌되었든 작가는 형언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린다. 표면 위 이미지들의 운명은 그 이야기의 파편이자 몽타주로 부유하는 것이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자.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휴머니즘’에서 캔버스 위의 붓질이 작가의 신화를 대변했다면, 캔버스 이면의 깊이란 형상 뒤의, 혹은 형상 너머에 있는 작가의 내면, 작가의 열망, 작가의 그 무엇이었다(혹은 그들의 미술사적 계보 안에 있는 그 무엇). 오늘날 많은 그림들은 그런 이면이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 그 이면은 이식된 내면성이자, 이미 내면성을 잃어버린 바깥이다. 깊이 없는 표면, 빌렘 플루서가 ‘피상성’이라고 부른 것은 디지털 매체만이 갖는 특징이 아니지 않을까. 이은경과 배수경의 그림들에서 우리는 형상의 이면, 곧 이야기에 가 닿을 수 없는 막연함을 느낀다. 이들의 그림에서 ‘이야기’(혹은 장면)는 분해되고 재조립되어 형상의 절편들로만 표면 위를 떠다니며, 어렴풋한 윤곽들로만 전달된다. 의미 작용을 벗어나는 형상들로 새로운 감각을 호출하는 이 표면들에서 우리는 회화의 기이하고 역설적인 ‘피상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이은경의 작업에서는 일상적 오브제들이 분해되거나 확장된다. 이 윤곽선 없는 그림들에서는 가장 견고한 물질성을 띠고 있어야 할 사물들이 껍질을 벗듯 터져 나와 속도감 있는 운동성으로 변모한다. 착시 혹은 환영의 시각적 변형 놀이, 그 형태와 엇나가는 절개 혹은 연장을 통해 작가는 가장 촉각적인 감각, 나아가 뒤틀린 공간과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다시 캔버스의 변형, 다각적인 배치로 그림과 실제 공간의 평행성, 이질성을 깨뜨리고자 시도하는데, 이 때문에 이미지는 또 다시 분할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불연속성은 저 일상적 사물들과 색채에서 우리가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감각들을 소환한다. 다시 말해 색면의 굴절, 연장, 접힘과 펼침으로 사물성이 해체되는 이 캔버스들에서, 우리는 -영화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가 구축한 새로운 차원의 구조물들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미지의 미로를 경험하게 된다. 배수경의 작업에서는 꿈과 생명체가 동일한 언어로 나타난다. 전체의 윤곽을 점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디로 뻗어 나갈 지 모르는 세포분열 같은 원시적 생명력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한-혹은 인정하지 않는-또 다른 나, 분열된 나를 등장시키는 꿈과 다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꽤 오랜 동안 꿈의 기억을 형상화시키는 일에 몰두해 왔으며, 꿈이 지닌 감각적 과장, 비약에 매혹되었다. 그런 감각의 메커니즘은 분명 사람이 아닌 생명체들에 걸맞은 것이었고, 때문에 작가는 그런 생물체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화상처럼 표현하곤 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곤충, 동물, 식물들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변형, 몰락, 재형성, 욕망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배수경의 이미지들은 한 번도 숲을 조망해 보지 못한 맹인이 숲의 내부를 단편적으로 더듬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더듬이는 굉장히 촘촘하고 느리다. 원초적인 혹은 전이된 토막들, 조각들로 구성된 이 두 작가의 그림들은 무기력한 사물들, 생명들, 기억들이 주고 받는 춤과 같다. 이 춤, 이 느슨한 몽타주들의 대화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탈구된 시선에 비동기화된(unsyncronized) 오브제들의 흔적도 강박적으로 반복되며 작가의 무의식을 덮치는 생명들의 변태(metamorphosis)들도 이야기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디 마디가 끊긴 이야기들의 색, 이야기들의 위장된 형상들(camoflage)이 안겨 주는 감각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그림들은 그 어떤 고정된 기의도 찾지 못한 우리의 불안한 신체를 폭로하면서, 닥쳐오고 뻗어 나오는-혹은 빨아들이는- 이미지로서 다가오고 시각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묘한 촉각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밖에....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녀가 그린 노란 형상이 포근하다기보다는 나를 뚫고 밀어닥칠 것 같지 않은가. 그/그녀가 떠낸 붉은 선들이 오히려 오한이 들 것처럼 소름 돋지 않은가. 그/그녀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무엇을 재현했든지 그 이미지에 베이는 것 같고, 찔리는 것 같고, 젖는 것 같고, 간지러운 것 같은 그런 이미지 조각들의 촉각적 피상성에 대해서 말이다.